고등학교 3년 동안 그 선생님한테 수학을 배웠다. 지금도 선생님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올 때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 느낌이 잊히지가 않는다.
30센티 정도 되는 손가락 굵기의 반들반들 윤이 나는 갈색 나무 매를 들고 교실 앞문을 확 여는 순간, 우린 모두 깊은 바다의 암흑 같은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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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문을 닫자마자 선생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침묵을 깨셨다.
"오늘 며칠이더라 12월 14일이지, 자 4번 14번 24번 34번 나와라
수학 교재 23페이지 문제 1번부터 차례대로 나와서 칠판에 풀어라."
다 푼 친구들은 정답까지 이르는 풀이과정을 정확히 설명해야 했다. 답을 썼더라도 풀이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답을 쓰지 못하는 친구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 여기서 취급이란 엉덩이 또는 손바닥을 맞는다는 것이다. 90년 후반, 여고였지만 체벌은 당연하듯 존재했다.
그래서 수학이 있는 날에는 그 날짜의 번호를 가진 친구들은 a4 한 페이지를 꽉 채울 만한 풀이식을 다 외웠다. 물론 나도 수학을 못했기에 열심히 외우고 또 외워서 선생님의 신임을 받았었다. 수학을 잘 외워서 푸는 아이로.
하지만 가끔 수학선생님이 좋아하는 야구팀이 지는 날에는 변수가 생겨 매 바람이 불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조용히 말씀하셨다.
"오늘은 14일이니깐, 4번, 14번, 24번, 34번 각 번호 짝꿍이 나와서 풀어라"
이런 날이 몇 번 반복돼 이젠 수학이 든 날의 날짜 번호를 가진 친구들 뿐만 아니라 짝꿍도 같이 철저히 준비를 했다. 그러자 변수는 다시 생겼다.
"오늘은 14일이니깐, 1 더 해서 5번, 15번, 25번, 35번 각 번호의 앞자리가 나와서 풀어라"
결국 선생님의 잦은 변수들 덕분에(?) 우리는 문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과보다 수학 평균 점수가 높았다. 물론 이과 수학이 더 어려운 것도 한몫을 하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월등히 높았다. 나도 내신 수학 점수는 잘 나왔다. 그런데 수능은 미리 외울 수 없으니 점수가 낮았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수학 선생님이 40대 초반 우리가 고3일 때 결혼을 하셨다.
선생님이 한 번은 도형 문제풀이를 하다가 각 a, 각 b, 각 c 하시다가 각 c? 각시? 새각시? 하시면서 혼자 얼굴이 붉어지시면서 배시시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우리에겐 "샘이 늦게 결혼을 해보니 결혼은 해도 안 해도 후회하는 거 같다. 그래도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결혼했다. 그런데 너넨 너네가 알아서 판단해라" 하셨다.
결혼 이후 수학선생님은 신기하게 변주에 변주가 더해졌던 공포의 문제 풀이를 더 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미리 다음 시간에 문제 풀이할대상자를 지목하고 가셨다. 우리도 처음 이 사실을 믿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문제풀이를 틀려도 체벌도 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윤이 나는 갈색 나무 매도 샘의 손에서 자취를 감췄다. 아주 가끔이지만 고3 수학 시간, 교실에서 웃음소리가 얼핏 난 적도 있었다. 공포는 사라졌었다.
우린 그때 결혼이란 정말 좋은 제도임을 확신하며 서로 21살 즈음되면 결혼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현실의 높은 벽(?)에 다들 서른 넘어 결혼을 했다.
저녁밥을 먹다가 '수학'이야기가 나왔다. 엄마는 수학을 어려워했다고 하자 육식주의자 열세 살 아들이 "엄마, 수학은 식을 잘 세우면 다 풀 수 있어"라고 조언했다. 공부에 뜻은 없지만 수학을 좋아하는 아들의 말을 듣다 보니 나의 수학선생님이 어떤 뇌의 흐름에 의해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수학을 잘 배웠다기보다는, 나는수학선생님에게 결혼을 하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확실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