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여긴 지금 설국이다. 발이 푹푹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하얀 눈을 보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반짝이는 하얀 물방울인 듯, 가루인 듯 바람 따라 훅훅 날리는 눈들을 보니 머릿속 가득 쌓이고 쌓였던 내 생각들도 같이 날아간다. 내 입속에서 나왔던 수많은 말도 눈과 같이 녹아버린다.
그렇게 많은 생각과 말이 필요했던가?
나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즐기다 못해 사랑했었다. 남편은 연애할 때 이런 내 모습을 신기해하며 "당신은 어떻게 다양한 주제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며 존경의 눈빛을 보냈었다. 남편은 말이 없는 경상도 사나이였다.
결혼 3년 차 즈음, 남편은 "저기 미안한데 미리 할 말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주는 게 어때?"라고 했었다. 그러면 본인이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었다가 어떤 의견을 말해야 할지 미리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유는 즉, 내가 하는 많은 양의 이야기들을 본인이 들어줄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우스갯소리로 말했지만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10여 년 전) 남편은 새로 오신 과장님이 밤 10시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셨기 때문에 항상 10시 이후 퇴근을 했었다. 그리고 과장님이 오기 전에 출근을 해야 한다며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도 그런 열정이 조금씩 사그라들어 과장님이 남아있어도 종종 칼퇴를 하곤 했다.
그 이후로도 나의 이야기는 끝이 없이 피어나고 지고를 반복하였다. 요즘 남편은 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면 아이들을 소집한다. "자 이제 엄마가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듣고 서로의 이야기를 해보자"라고 한 뒤 본인의 한쪽 귀는 티브이로 열어놓곤 하는 것 같다.
본인은 집중한다고 늘 말을 했기 때문에 믿기는 한데, 그런 합리적 의심이 들 때가 있긴 하다.
그런데 그런 내가 최근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좀 줄었다.
김주무관으로 이미 회사에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너무 많은 말을 하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면 잠시 정지의 시간을 갖는다. 매일 업무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이 케이스'들, 판단은 오로지 내가 해야 한다. 팀장님, 전임자 등에게 조언을 구할 수는 있으나 1차 판단은 내가 해야 한다. 담당자의 판단은 웬만하면 팀장님 결재에서 뒤집히진 않는다.
왜냐면 이미 담당자가 본부나 다른 고용센터의 담당자들에게 수차례 조언을 구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담당자의 1차 판단은 대부분 존중되는 것 같다. 가끔은 의견을 구할 수 있는 모든 곳에 전화를 해봐도 모두 처음 보는 케이스라며 아예 의견을 주지 못할 때도 있다. 본부 담당자에게 물어도 이런저런 방향성은 있으며 이 방향으로 판단해 볼 수도 있겠으나 주무관님이 조사한 자료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남편이 그랬다. "애들아, 엄마가 오늘 말이 별로 없네.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빨리 쉬게 해주자". 그리고 '말이 없는 내가 낯설다'며 '빨리 하고 싶은 이야기 다 꺼내보라고 충분히 들을 시간 있다'며 이야기를 종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원하니 어쩔 수 없군, 자 커피숍 갑시다." 하면 약간 두려워하는 눈빛이 살짝 있기는 하나 이내 차키를 챙긴다.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기엔 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이야기들은 줄긴 했다.
지금처럼 수북하게 조용히 쌓이기만 하는 하얀 눈을 보니, 나의 판단을 위해 끝없이 가지를 펼치는 생각들과 의견을 구하기 위해, 설득하기 위해, 조사를 하기 위해 그리고 설명을 하기 위해 펼쳐지는 나의 끝없는 말들을 이곳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부디 눈과 함께 모두 이곳에서 녹아버리기를, 바람에 날려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