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일지의 구 씨가 '추앙'하라는 말에 '추앙'이라는 단어를 네이버 어학사전에 검색한 것처럼 나도 포털에 '절댓값'을 검색해봤다.
예상한 대로 수학적 개념이었다. 내가 읽은 정보들을 통해 이해한 바로는 절댓값이라는 것은 원점으로부터의 거리(?)이다. 거리는 음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양수로만 표시된다. 문과인 나는 눈을 감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한 말들을 하나둘씩 되짚어 봤다. p주무관이 나에게 던진 저 한마디의 진정한 의미를 깨치기 위해서.
상황은 이랬다.
최근 고용센터는 신규발령을 앞두고 술렁였다.
작년엔 대부분 지청으로 신규발령을 냈는데 올해는 우리처럼 다시 센터에 신규를 발령내고 센터의 기존 직원 일부를 지원받아 근로감독관으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형급 태풍으로 센터를 덮쳤다. 이미 가기로 했던 자와 오랫동안 가기를 꿈꿨던 자와 갈 수 없음에도 가려는 자와 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으려는 자와 남은 자들의 업무조정 등, 모두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나는 상담직이라 근로감독관을 지원하는 고민은 안 했지만 몇 명이 빠져나갈 경우, '남은 자'가 되어 이후 업무조정이라는 폭우나 폭설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풍 속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몇 가지들이 있었는데 그게 왠지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이렇게 '일'을 해야 하는 또는 '일'을 시켜야 하는 자리를 충원할 때, 1순위로 늦깎이 공무원들은 제외한다는 것이다. 조직이 늦깎이 공무원을 바라보는 시선의 민낯을 보니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안에 쓴 맛이 도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 늦깎이라고 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늦깎이라고 일을 우수하게 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고 최선을 다 하려는 늦깎이 공무원들도 있다. 그런데 애초에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모습은 조금 서운했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은 공무원이 조직에선 편하겠지. 그러겠지.
내가 사장이라도 '일'을 시켜야 하는데 조금 더 젊은 게 좋지 않겠는가. 천 번 백번이 아니라도 한 번만 생각을 양보해도 너무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다. 세상살이 다 그런 건데, 늦깎이들은 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
늦깎이 동기들은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조직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고 굳이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걸로 늦깎이들은 서로의 눈빛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p주무관에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20대에 이곳에 왔다면 나는 지금 20대 주무관들처럼 못했을 거야. 난 그땐 좀 대책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실수만 엄청하고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그랬을 거야. 늦은 나이에 왔으니 이렇게라도 하고 있는 걸 거야"
지금의 분위기를 알고 있고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던 p주무관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일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주무관님이 '절댓값'이에요. 과거로 가도 주무관님의 절댓값은 변하지 않아요. 주무관님이 '절댓값'이라는 거 잊지 마요.
나는 주무관님처럼 늙고 싶어요. 나이가 들면 모든 게 시들어지고 공부도 안되고, 말도 안 되는 옛날 말만 고집스럽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무관님을 보니 나이가 들어도, 늙어가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샘은 항상 미래만 있어요. "
순간 이해를 못 했다. 더 길게 대화할 시간이 없어 모태 이과인 p주무관에게 묻지 못했다.
'샘, 내가 절댓값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사전을 찾아 '절댓값'이라는 개념을 이해했을 때, 머리 뒤쪽에서 '쿵'하는 울림이 왔다. 그리고 그 울림은 심장에 닿았고 나는 약간 눈물이 났다.
젊은 사람을 우선하는 조직을 탓하고 있었던 나에게 p주무관은 그건 나에게 어떤 변수도 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음수가 붙어도 양수가 붙어도 앞으로 가던 뒤로 가던 절댓값은 향상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