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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Nov 05. 2022

심리테스트에 빠진 채식주의자와 대화

김주무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엄마, 내 이야기를 듣고 그 장면을 그려본 다음, 딱 한 번에 떠오르는 그걸 말해주면 돼요. 자 시작한다.


"엄마가 고등학생인데 수학여행을 갔어,

장기자랑을 하는 어떤 남학생들이 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엄마를 보고 윙크를 한 거야.

그런데 그 남학생이 공연이 끝난 후, 엄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을 한 거야.

엄마 그때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엄마 오래 생각하면 안 돼, 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말해줘"

 

나는 "엄청 기분이 좋을 거 같은데,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는 거잖아."라고 말했다.


"음, 그럼 엄마 그 남학생이 엄마한테 책을 선물했어. 그 책의 페이지는 총 몇 페이지일 거 같아?"


나는 "200페이지"라고 바로 말했다.



채식주의자인 5학년 둘째 아들은 요즘 심리 테스트에 빠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심리테스트 후 그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에 빠졌다.  매일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가면 저렇게 바로 훅 하고 심리테스트 질문들을 들이댄다.


물론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그리고 심지어 답변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심리테스트 질문들이지만 아주 새로운 것처럼, 처음 들은 질문처럼 진심을 다해 답을 한다. 사람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왼쪽 귀로 들어온 첫 단어에 뇌는 바로 '나도 아는 심리테스트이다'라고 답을 줘도 내가 다시 '처음 들어본 심리테스트다'라고 입력하면 뇌는 '맞다. 생각해보니 모르는 심리테스트 질문이다'라고 답을 오른쪽 귀에 내려준다.


그래서 답을 하고 나면 심리테스트 결과가 너무 궁금해진다. 처음 들어본 질문이니 말이다. ㅎ


채식주의자는 무척이나 궁금해하며 답을 듣고자 조급해하는 엄마의 마음을 순간 즐기기로 한다.

"음 ~~~ 엄마는 보니까, 좀 맞는 거 같아. 그런데 엄마가 좀 심심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나는 "그러니까 뭔데???? 자세히 말해줘봐봐 봐" 라며 발을 동동 구르면

그제야 후하게 인심을 쓰듯 심리테스트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엄마, 첫 번째 수학여행 중 고백받는 상황은 엄마가 청혼을 받았을 때 엄마의 솔직한 기분이야.

엄마는 보니까, 아빠의 청혼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네, 이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거 같아.


그런데 엄마! 책의 페이지는 그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은 시간이거든, 엄마는 200년이야.

엄마 괜찮겠어? 200년이면 좀 힘들 거 같은데, 그래서 내가 심심하지 않을까라고 한 거야."



요즘 심리테스트에 빠진 채식주의자 아들 덕분에 잊어버렸던 나의 기분을 다시 기억하는 중이다.

하루에 두 개 이상의 심리테스트를 채식주의자 아들을 통해 한 후, 아들에게 나도 몰랐던 나의 각종 심리들을 분석당한 후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가고 있는데, 꽤 재밌다.



그리고 그때,

뉴스에서 이태원 참사에 대한 각종 소식들을 전하고 있었다. 채식주의자 아들에게 물었다.

초등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학교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


"엄마,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해" 5학년 아들 얼굴에 무거움이 깃든다.


나는 "어떤 말을 했는데? 엄마한테만 말해주면 안 돼"라고 하니


"엄마, 선생님이 선생님이 말한 선생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달래. 개인 생각이고 나랑 너희랑만 알고 싶은 이야기라고 하셨거든, 그런 선생님의 마음을 어기는 건 아닌 거 같아."


나는 "아 그래, 그렇지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되지, 계속 알려달라 해서 미안"

채식주의자 아들 말이 맞다. 나랑 너랑만 알고 싶다는 이야기인데 함부로 여기저기 말하지 않는 게 맞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세상을 잘 아는', '돈과 서류로 연계된' 어른들하고만 업무용 단어들로 이뤄진 업무용 대화만 하다가 퇴근 후 채식주의자 아들과의 대화는 나의 가슴에 따뜻한 피를 충천해주는 제주도의 사려니숲길 같았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배워가는 채식주의자 아들을 통해

나도 다시 배워가 본다.

<사진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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