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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런던의 스카이라인

8년 동안 런던의 하늘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by 후안

이번 여행의 첫 발걸음을 디딘 곳 런던은, 8년 전의 여행에서도 그 시작점이 되었던 곳이다. 이미 한 번 방문해 구석구석 다녀본 도시인지라 모퉁이에 설 때마다 꼬박꼬박 지도를 들여다봐가며 길을 선택하지는 않아도 되긴 했지만, 여행 첫날이면 으레 따라오는 긴장과 설렘은, 아니나 다를까 여장을 풀어낸 후에 오히려 더 아득한 무게감으로 느껴진다.

금요일 아침을 막 시작한 이 거대 도시의 반짝이는 쇼윈도 수천 장에,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이방인의 기운을 열심히 난반사해나가며, 아내와 나는 천천히 첫 외출에 나섰다. 그리고 템즈에 닿을 무렵 이 도시가 어딘가 달라져있음을 눈치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탑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수년 전 잠깐 스쳐간 이 여행자에게도 분명히 느껴지던 도시의 이질감이 눈으로 확인되었다. 런던의 스카이라인이 확연하게 달라져 있는 것이다.

8년 전 시선을 단 번에 잡아끌던 걸킨(Gherkin) 타워는 이제 워키토키, 치즈 그레이터 등 다른 마천루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한창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던 312미터짜리 샤드(Shard) 건물은 수만 년 전 이 섬과 함께 솟아오르기라도 한 듯 당연한 자태로 템즈강을 향해 무겁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며칠 후 템즈 클리퍼를 타고 그리니치로 가는 길에 바라다보았던 카나리 워프 쪽은 저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고층빌딩이 군집되어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고 있었다.)


샤드와 거의 같은 높이로 세워질 튤립 타워의 건설 계획도 발표되었다 하고 이에 질세라 새로운 건축 계획들이 줄줄이 뒤따르고 있는 모양이니, 앞으로 이 도시의 조망이 얼마나 더 달라지게 될지 쉽게 감잡을 수는 없다. 다만, 템즈 남쪽으로 말라죽은 나무처럼 비죽이 솟아오른 앙상한 타워크레인들의 숲을 보면서, 몇 년 후면 또 완전히 새롭게 그려질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대략 밑그림 그릴 수 있었다.



로마인들이 처음 이 외딴 섬나라로 건너와 요새를 두르고 론디니움이라 이름을 붙인 이후 지금까지의 이천 년의 시간을 고려해보면, 이 늙디늙은 도시에게 8년이라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은 순간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런던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어도, 스카이크래퍼에 대한 광기가 도시의 중심을 휩쓸고 다닌다는 것은 확실하다. (로마인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가 10년 만에 로마를 재방문한다고 해도 -그 도시에 스카이라인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 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아도- 도시의 풍경이 이렇게 삽시간에 변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짧은 이방인일 뿐인 나에게는 새로 그려지는 이 도시의 풍경에 좋다 나쁘다 평가할 자격도, 그 평가를 부추길 근거가 될 도시미학적, 공학적 지식도 없다. 그저 가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서 조용한 감탄과 함께 그 사이를 지나쳐 가면 그뿐.



중력은, 도시의 모든 것을 끌어내려 소멸시키려 든다. 그리고 거기에 끊임없이 저항해 버텨서는 것이 도시의 숙명이다. 이미 오래전에 거기에 굴복했던 수천 년의 문명과 도시들의 유해가, 이 도시가 버티고 있는 지층 아래 수백 겹 깔려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중력을 거부하며 건물을 쌓아 올려나간다.


다만, 겁 없는 이 도시가, 이천 년 전의 잔해일 뿐인 런던 월의 흔적을 모른 척 덮어버리지 않고, 오늘 지어지는 건물 속으로, 중심가의 도로 안으로 고스란히 품어 간직하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겸손한 각오 또한 아직 이 곳의 든든한 지반으로 남겨둔 것은 대견한 일이다.

새로운 구상과 구조들을 저 감옥 같은 테이트 모던에 눌러두지 않고, 밖으로 꺼내어 세상에 없던 것들이 도시에 끊임없이 돋아나게 만드는 이 용기에 대한 평가는, 세대가 몇 번 바뀐 후에 이 곳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맡겨도 늦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과연 칭송받을 용기였을까 낯부끄러운 만용이었을까 미리부터 궁금하기는 하다.


8년 전에는 지구상에 없던 짙은 그림자 사이를 걸으며, 그 사이 중력과 시간에 순순히 굴복하여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몇십 킬로 짜리 인간의 몸 안에서, 나는 생각해보았다.


2019년 10월, 런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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