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anje." 쿠바에서 던진 사랑 고백

산티아고 데 쿠바, 럼 박물관에서

by 후안

쿠바에 온 지 일주일째 되는 아침이었지만,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순식간에 기온이 10도 가까이 솟아오르며 푹푹 찌는 날씨로 변해버리는 이곳, 산티아고 데 쿠바의 날씨는 여전히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이틀 후면 12월이 되는데 말이다.)

그나마 고마운 것은 새벽녘 섭씨 20도 되는 기온이 한낮이 되면 30도까지 올라가는 대신, 습도는 100%에서 60% 미만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강렬한 햇살에 피부가 따끔거리긴 해도 끈적거리는 불쾌감은 덜한 상태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수요일 아침, 일찌감치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한바탕 시끌벅적했던 숙소 앞 골목길이 조금 한산해질 무렵, 우리는 까사 주인 밀레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의 두 번째 날 유랑의 길을 나섰다. 오늘은 산티아고 데 쿠바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솟아있는 언덕 지역을 탐방할 계획으로, 운치는 있지만 꽤나 가파른 빠드레 삐꼬 계단(Escalinata Padre Pico)을 오르면 지하투쟁 박물관(Museo de la lucha clandestina)과 피델 카스트로의 생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우리의 일정은 아주 여유가 넘치는 편이라, 꼭 마음먹은 방향이 아니라도 아무 곳이나 이끌리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말 그대로 유랑을 즐겨도 괜찮았다. 그리고, 이 날도 지나가는 길에 문을 연 교회에 조용히 들어가 땀을 식히기도 하고, 초등학교의 열린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소식판을 구경해가면서 느린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눈 앞에 거대한 관이 달린 증류용 솥이 나타났을 때 그냥 지나칠 이유가 없었다. 순백의 빛으로 깔끔하게 페인트 칠해진, 넓지는 않지만 잘 관리된 정원을 가진 그 건물은 럼 박물관이었는데, 박물관이 숙소 근처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가까운 곳이니 언제가 되었든 한 번 들리자고 했던 것이 골목을 돌고 돌다 보니 결국 먼저 발길 닿은 것이다. (사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중심지라고 할 만한 곳은 크게 넓지 않아서, 일주일 가까이 머물면서 부지런히 돌아다닌다면 거의 빠짐없이 볼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쿠바의 럼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이겠지만,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도 오랜 전통을 가진 훌륭한 럼주를 꾸준히 생산해 오고 있으며, 나름 박물관까지도 운영하고 있다. 물론 박물관이라고는 해도 그냥 조금 큰 집 하나를 개조한 곳으로 직원 서너 명과 마당을 오가는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인,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은 곳이지만.


건물에 들어서면 따로 매표소나 리셉션이라고 할 만한 곳 없이, 로비 한가운데 덩그러니 (아마도 하얀 페인트로 덧칠했을) 퀸 앤 양식의 테이블 하나에 토넷 의자가 놓여있을 뿐이다.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 차림으로 그곳에 앉아있던 할머니 한 분이,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꽂아 내려놓으며 두리번두리번 들어오던 우리를 반겼고, 우리는 두 사람 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전시실 안으로 입장하였다.

전시물들은 소박하지만 한눈에 그 쓸모를 알 수 있는 것들로, 사탕수수를 베고, 짜내고, 발효시켜 증류하고 병에 담는 과정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시물을 절반쯤 보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려 하는데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았던 할머니가 우리를 손짓해 부른다. 돈을 치르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나 싶어 얼른 다가갔지만, 얼굴 가득한 웃음을 보아하니 별다른 문제가 있어 호출한 것은 아닌 듯하다.


“뭘 하나 물어볼 수 있나요?”

“예, 괜찮아요.”

“당신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지요?”

“한국이요. 남쪽.”

“오, 잘 됐네요. 그러면...... 사랑한다는 말이 한국어로 뭔지 좀 알려주세요.”

“사랑해라는 말요? Te amo?”

할머니에게 천천히 사.랑.해.라고 몇 번 말해주자 벌써 앞에 펼쳐놓은 수첩 위에 또박또박 받아 적는다.


SARANJE.


내가 펜을 넘겨받아 그 아래 한글로 ‘사랑해’라고 쓰는 중에 할머니의 수첩을 훑어보고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던졌다.

“전 세계의 말로 Te amo를 모으고 있군요?”

방금 적힌 그 말 위로도 한참이나 많은 사랑의 말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빼곡히 쌓여있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일기를 들킨 소녀처럼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지 않은 로비 한가운데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고 앉아 하루를 보내는 이 할머니. 온 세상의 말로 사랑 고백을 받고 있는 이 할머니의 작은 취미는 럼주의 향기만큼이나 달콤한 향기를 풍겨서, 관람의 마지막에 받아 든 시음용 럼에 아직 입을 대기도 전에, 우리는 살짝 행복한 취기에 젖어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