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 말레꼰에서
아바나의 북쪽으로 플로리다 해협을 바라보고 6킬로미터 가까이 이어지는 ‘말레꼰(malecón)’은 스페인어 뜻 그대로 그냥 ‘방파제’라는 이름이다. 아바나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이 장소가 다른 길처럼 성인(聖人)의 이름이나 혁명가의 칭호는 고사하고, 올레길, 둘레길 같은 이름 하나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불리는 셈인데, 그저 마을 뒤쪽에 있는 산은 뒷산이고, 뉘 집 개든 누런색이면 죄 누렁이로 부르는 향촌의 느긋함이 느껴져 더 마음이 가는 이름이다. (심지어 도로명조차 따로 없어서 베다도 지역으로 가면 말레꼰 다음 길부터 1번 도로, Calle 1ra가 된다.)
태양이 수평선에 닿을 무렵이면 마치 바다가 아닌 육지 쪽에 기조력이 생기기라도 한 듯, 뻐끔대며 하루의 안부를 확인하는 갯벌의 생명들처럼, 바다를 향해 걸어 나온 아바네로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는다.
바다를 면하고 열차처럼 길게 뻗어있는 이 길 어디든 사람이 끊기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핫플레이스라 할 만한 자리도 있다. 나씨오날 호텔과 아바나 대학 사이를 지나는 23번가는 완만한 오르막길로 되어 있어 ‘라 람빠(la rampa: 경사로)’로 불리는 곳인데, 조금만 올라가면 아이스크림 가게 꼬뻴리아(Coppelia)가 있는 데다가 인공폭포가 있는 작은 공원에는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기 때문에 나우따(Nauta) 와이파이 카드를 구입한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듯 소박한 플라스틱 통을 하나씩 들고 나온 낚시꾼들은 말레꼰 어디서나 만날 수 있지만, 아바나항 입구 쪽에 특히나 많이 모여드는 편이고, 낚싯대도 서너 개를 한 번에 사용하는 숙련가들이 많은 걸 보면 조황이 특히나 좋은 자리임에 분명하다.
사람들이 이곳에 나오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한낮 동안 내리쬔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방파제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다 가기도 하지만, 건전지를 든든히 채운 스테레오를 어깨에 짊어지고 요란한 음악을 즐기기 위해 나온 패거리들이 있는가 하면, 간판 하나 없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구입해 나온 맥주 한 병으로 천천히 목을 축이기 위해 찾는 이들도 있고, 아무 말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돌아앉아 석양을 마주한 연인들부터 웨딩촬영을 하러 나온 예비부부, 아이가 여럿 딸린 가족, 조만간 있을 운동회를 위해 달리기 연습을 하러 나온 초등학생들도 있다.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이별하며 물건을 사고 또 팔고,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하는 곳.
기점도 종점도 없이 길게 늘어진 이 파노라마를 차곡차곡 잘 접어 사각(square)의 모양으로 모을 수 있다면 다른 도시의 광장과 비슷한 모습이 되기는 할 테니, 말하자면 이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광장이 되고 막다른 곳이 중심이 되는 셈이다.
아바나에 있는 동안 아내와 나는 이곳을 몇 번이고 지났다. 어떤 날은 베다도에서 올드 아바나까지 3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걸어가 보는 어리숙한 이방인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새빨간 1960년형 포드 썬더버드를 타고 내달리는 관광객이기도 했으며, 가끔은 그저 사람들 틈에 섞여 앉아 같은 카리브해의 바람에 등을 식히는 신참 아바네로이기도 했다.
- 2017년 11월 그리고 12월, 아바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