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거나 특이하거나 사랑스럽거나
377일 동안 싸돌아다니면서 묵었던 숙소들을 우리는 늘 '우리 집'이라고 불렀다. "오늘 저녁은 집에 가서 해 먹자" 라든지 "어머! 그거 집에 놓고 나왔다" 라든지 어설프게 유목민 놀이하던 우리에게 '집'은 숨길 수 없는 정착민 본성이었나 보다. 말이 쉬워 377일이지 그 수 많은 날들을 호텔, 게스트하우스, 에어비앤비를 전전한다는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열쇠 돌리는 법, 가스레인지 켜는 법, 심지어 화장실 물 내리는 법까지 다양해서 안절부절 못했던 세계의 집들. 그 중 고르고 골라 우리가 사랑한 집 6 곳을 소개한다.
어머 여긴 살아야 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이 집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가자 마자 보이는 대빵 큰 창문으로 햇빛이 예쁘게 들어오는데 양 옆 벽에는 비비드한 그림들이 열맞춰 걸려있었다. 직장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호스트. 그는 호스트라기 보다 우리 삶의 롤모델이었다. 글치.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취미로 하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일을 하고 부업으로 에어비앤비를 하는...이 집에 머무는 시간 동안 나는 호스트에게 envy 뻐꾸기를 수 없이 날렸다. I envy you seriously!!
커피로 유명한 콜롬비아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여행을 떠나기 망설여지는 나라다. 월드컵에서 골을 허용한 골키퍼를 총으로 쏴 죽이는 나라, 한 때 남미에서 가장 큰 마약 카르텔이 있던 나라. 그런 악평들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보고타는 여행자에게 너무나도 흥미로운 도시다. 여행 중 사고라는 것이 늘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다가' 벌어지는 것인데 사건에 가려져 예술의 도시 보고타를 보지 못하는건 너무 슬픈 일이다. 남미에서 가장 화려한 그래피티가 있고, 포동포동하고 앙증맞은 작품세계가 돋보이는 현대미술의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가 있는 도시가 바로 보고타인데 약간의 경계심과 함께 조심조심 다니면 또 남미에서 보고타만큼 재미있는 도시가 없는데 말이야. 우리 보고타 내가 이르케 아낀다.
포르투칼의 대표적인 두 도시 리스본과 포르투 그 사이에 대서양을 면하고 있는 나자레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나자레는 작은 마을이지만 써퍼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도시다. 높을 때는 30미터가 넘는 파도에 매해 여름만 되면 전 세계의 내노라 하는 서퍼들이 홀린듯이 이 마을로 몰려든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아쉽게도 서핑 대회가 열릴 시점은 아니었지만 바다가 다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강려크한 칼바람과 함께 괴물같은 파도가 절벽을 사정없이 때려대는데 그 소리와 크기에 전망대 위에 있음에도 혹시 우릴 덮칠까봐 조마조마하다. 간혹 사람들이 전망대 주변에 차를 주차하기도 하는데 '바람이 너무 강해서 차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는 경고문구에 사태를 실감한다. 그리고 그 나자레에서 우린 또 잊을 수 없는 숙소에서 묵게됐다.
어촌 마을답게 심플한 하얀 벽에 그려진 물고기 그림. 방의 가구들은 심플한 모양새가 숙소 주인이 직접 만들었을 것 같은 소박한 맛이 있다. 구 모양 전등 안의 할로겐 조명이 유난히 따듯하게 느껴지고 단색의 붉은 커튼도 단정하니 전체 인테리어에 제법 잘 어울리는 느낌. 주로 식당으로 사용되는 공간도 심플한 대형 테이블이 있어 오가는 여행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기 좋다. 나자레에는 칼 바람과 무서운 파도가 있지만 이 숙소는 여행자와 써퍼를 따듯하게 안아준다. 그리고 사실 이 숙소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요 뷰. 다홍색 지붕과 하얀 벽들이 정갈하게 묘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마을 너머로 시원하게 뻗은 대서양. 개인적인 느낌으로 대서양은 되게 남자남자한 바다다. 다른 바다들보다 색이 짙어 코발트 블루에 가깝고 파도도 굉장히 커서 가끔은 부서지는 파도가 강렬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 매일 아침 이렇게 강력한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며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숙소. 우리는 이 숙소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스타에서 한번쯤은 봤던 알록달록 풍선같이 생긴 '열기구 사진'으로 유명한 도시 카파도키아의 역사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9세기경 아랍인들은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심한 간섭과 박해를 가했는데 그 박해받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이들이 이주한 곳이 바로 이 곳 카파도키아였다. 그래서인지 도시 곳곳에 기독교인들의 유적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가 데린쿠유라는 지하도시인데 깊이가 무려 85m. 지금이야 건축기술의 발달로 지하 85m짜리 건물들이 많지만 그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도시를 만들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이렇듯 초기 기독교인들은 카파도키아에 동굴을 만들어 살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현대에 와서 터키는 이러한 동굴 문화를 '동굴숙소'라는 이름으로 관광자원화 시켰다. 그래서 카파도키아 마을에 가면 그렇게 동굴숙소들이 많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유명 호텔에서 하는 동굴숙소는 관광산업에 맞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라는 거다. '진짜동굴'은 이 마을에 2개인가 밖에 없다고. 우리는 운좋게도 바로 그 둘 중 하나인 숙소에서 묵었고 이 숙소는 심지어 숙박료 자체도 굉장히 저렴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진짜 생생한 역사적인 숙소. 가끔 가난한 세계여행자들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행운이 따른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에어비앤비를 자주 이용하다보니 나름 호스트들의 직업에 대한 통계적인 자료들이 쌓인다. 숙박업소 주인, 여행사 사장, 은행직원 등 호스트들의 직업이 굉장히 다양한데 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직업군은 바로 예술인들이다. 예술인들 중에서도 특히 미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직업적인 특성상 집을 예쁘게 꾸며 놓은 경우들이 많고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예술가들의 꾸준한창작활동을 위해서는 늘 부수입이 필요한 법이다. 두 마을을 잇는 거대한 다리인 '누에보 다리'로 특히 한국사람들한테 유명한 스페인 남부 도시 론다의 호스트 또한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예술가였다. 시설 그 자체는 그렇게 깨끗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집 곳곳에 묻어 있는 예술가의 흔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집이었다.
곳곳에 호스트의 예술적인 감각이 묻어나는 소품이 인상적인데 그 중 백미는 화장실이다. "굳이 화장실을?" 하는 마음도 있는데 생각해보면 어떤 건물을 가든 화장실이 깨끗하면 그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에 샤랄라한 욕조커튼. 파스텔 톤의 세면대, 비데, 욕조가 제법 잘 어울린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괜히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하게 된다. 그러나 따듯한 물이 되게 짧게 나왔던 기억이. 싸고 예쁜 숙소는 그 정도는 익스큐-즈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집의 사랑스러운 개 레오. 테니스공을 던지면 물어오는 놀이를 좋아한다. 덩치가 큰 개들일수록 두려움이 많다는 것을 레오를 통해 다시한번 확인했다. 혹시라도 우리 인생에 마당 넓은 집에 사는 기적이 온다면 그 때는 꼭 큰 개를 키우자고 레오를 보며 다짐했다.
어르신들과 한 번이라도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나한테 그렇게 부담주시지 않으시지만 괜히 음식은 입에 잘 맞으시는지, 잠자리에 불편함은 없으신지... 심지어 잘 못하는 영어도 잘하는 척해야 한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여행하는 며느리나 장인장모님과 함께하는 사위라면 더더욱. 그리고 우리는 세계여행 중에 장인 장모님 그리고 처남과 스페인 여행을 함께 하게 됐다. 바르셀로나는 유럽에서 워낙 유명한 관광도시라서 호텔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다. 이럴 때 역시 가장 좋은건 에어비앤비. 특히 에어비앤비의 마법은 약간 규모있는 숙소를 선택할 때 가성비가 올라간다는데 있다. 장인 장모님 처남 그리고 우리 부부 성인 다섯명이 묵을 숙소를 구하다가 우리는 파밀리아 사그라다 성당과 걸어서 10분 거리인 꿀 포인트에 100년된 아파트에 묵기로 했다. 방은 2개이지만 거실에 소파베드가 있어 짐꾼인 처남도 편히 잘 수 있는 아파트. 이 아파트의 호스트는 재즈 밴드를 하는 아르헨티나 뮤지션이었다. 이렇게 깔끔한 아파트가 100년이나 됐다는 사실에, 또 호스트가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는 말에, 필요한게 있으면 리셉션에 전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장인장모님은 이 숙소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셨다. 센스있는 사위로 점수 좀 땄던.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건 매일 밤 숙소에서 한식 파티가 열렸다는 것! ㅠㅠ 세계 3대 도둑. 간장게장. 비(정지훈) 그리고 우리 장모님 김치.
물가가 꽤 높았던 유럽에서 렌트카+캠핑 으로 제법 솔솔하게 비용을 아꼈던 우리는 유럽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텐트를 처분하기로 했다. 독일에서 55유로 정도에 산 텐트를 이집트의 귀인께 25유로였나에 팔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개이득이었다. 세계여행자에게 텐트는 되게 좋은 아이템이긴 한데 역시 무게가 문제였다. 다시는 캠핑할 일 없겠지 하며 '개이득!'을 외치며 텐트를 팔고 룰루랄라 지구를 돌다가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도착해서 그랜드캐년 여행을 알아보다가 그제서야 개이득을 외쳤던 과거의 우리 놈들에게 갖은 원망을 퍼부었다. 그랜드캐년은 텐트가 필수였던 것이다. 그랜드 캐년을 여행하던 시점은 우리 여행의 거의 막바지였다. 이제 와 텐트를 사자니 너무 아까웠고 텐트를 빌리는건 가성비가 안 맞는다. 그렇다고 산장을 예약하기에 미국의 물가는 말 그대로 후덜덜. 어떡하지 어떡하지. 데굴빡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혹시....하는 마음에 에어비앤비에 '그랜드 캐년 텐트' 하고 쳐 본다. 있다! 있어! 우리 같은 여행자들을 위해 미니 캠핑장에 설치된 텐트를 빌려주는 귀인이. 심지어 아침도 준다니! 의로운 망자 귀인 김자홍이요!
그랜드 캐년 귀인의 직업도 되게 흥미진진했다. 짧은 영어로 이것저것 물어보니 자기는 지금 여기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원래 애리조나가 농작물이 자라기 힘든 지역인데 매 해마다 토지를 개간하며 나름 이것저것 실험을 하는 미래퓨처농사꾼이었다. 저 오두막에 혼자 살면서 애리조나에 맞는 농작물이 뭘까 매일 시험한단다. 미국은 엄청나게 큰 영화세트장인가. 영화같이 사는 사람이 되게 많네. 우리 귀인의 올 해 농사가 대박터지길 멀리서 빌어 봅니다.
위에 소개한 6개의 집 말고도 사실 예쁘고 특이한 숙소들이 더 많은데 사진을 찾아보니 숙소 사진을 찍은게 많지 않아 소개하지 못해 아쉽다. 숙소에 가면 외관 사진 찍고 침대사진 찍고 주방, 화장실, 복도, 계단....헥헥....나는 위대한 사람은 돼도 성실한 사람은 아마 안될거야. 브런치 쓰니깐 또 여행가고 싶다. 아...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