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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느니 쓰지 Aug 22. 2018

하루키가 내게 달리기를 영업했다 그래서 나는

No.9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아버지는 은근한 스포츠맨이었다. 특별히 달리기와 탁구와 등산 같은 것을 잘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장면은 어느 휴일이었는데 아버지는 회사에서 주최하는 어느 장거리달리기에 나갔고 저녁에 메달같은걸 흔들며 상기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던 모습다. 금은동도 아닌 완주한 자들에게 기념으로 주는 메달이었는데 성취감으로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마 그 날은 호탕하게 삼겹살 먹는 우리를 용납해 주셨던거 같다. 평소에는 여간 못마땅했던 우리의 육식을.


아버지를 제외하고 엄마, 형, 나는 비만 혹은 과체중에 속하는 몸매다. 그렇기에 집안에서 유일하게 마른 체형을 유지하는 아빠는 언제나 우리 셋을 못마땅히 여기셨다. 뚱뚱은 게으름이고 그것은 죄악인 것처럼 잔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잔소리의 결론은 언제나 윗몸일으키기를 해라, 나가서 좀 뛰어라 로 귀결됐다. 세상에서 하라고 할수록 하기 싫어지는 두 가지는 공부와 다이어트다. 너도 니 엄마 닮아가냐, 저거 저거 젊은놈이 배나온 것좀 봐, 너 그러다 곧 성인병 온다 등 나를 위한 말로 포장된 인신공격은 거의 일상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잔소리와 그것을 뛰어 넘는 나란 놈의 귀찮음. 한번은 그치지 않는 잔소리에 못이겨 이런식으로 반격을 했다. "아부지는 말랐지만 성격이 못 됐고 나는 뚱뚱해도 성격이 좋아!" 불효자는 오늘도 운다.

하루키가 자주 뛰었다는 보스턴 찰스강변. 아쉽다. 미리 알았다면 나도 뛰고 오는건데...


그렇게 뛰기 싫어하는 내가 오늘 나이키 러너 어플을 다운 받고, 신발끈을 동여 매고, 달리기에 적당한 음악을 찾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책에서 하루키는 내게 한번도 뛰라고 닥달하지 않았는데 책을 읽다보니 왠지 안 뛰면 안될 것 같았다. 아니 오랜만에 뛰고 싶어졌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신성시하거나 그 매력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리고 뛰지 않는 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을 수련하게 하는 도구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는 말한다. 예의 일본 사람들의 삶의 태도처럼. 하루키에는 그것이 달리기였고 젊은 시절 소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쓰고자 하는 마음에 시작한 달리기인데 매년 마라톤 완주와 트라이슬론에 참가하는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소설가이자 러너'라고 써달라고 할 정도로 달리기를 애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사랑함에도 그 자체를 미화하지 않음이 내가 이 책을 좋아하고 다시 달려볼 용기를 갖게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달리기에 대한 그의 좋은 말들을 남긴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p45)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랗다. 성취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 라는 안도감뿐이다. (p103)
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 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 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p107)
하루키가 자주 뛰어댕긴 뉴욕 센츄럴 팔크


그리고 이건 2018년 8월 22일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_ver.앓느니 쓰지>
(기니까 읽기 귀찮은 사람은 skip)

마지막으로 뛰었던 날을 기억한다. 세계일주를 위해 회사를 그만 둔 다음 날 나는 세계 곳곳에서 아침 마다 햇살을 받고 달릴 나를 상상하며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돌았다. 해봐야 2km쯤 되는 짧은 거리일텐데 한 이틀 정도 달리고 나서 이내 나는 그만 두었다.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세계일주 가서는? 우리의 좋았던 기억속에 달렸던 기억은 없다.

근 1년만에 다시 중랑천에 나와 달리기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발목 몇 번 종아리 몇 번 휘휘 돌린다. 달리는 행위 만큼이나 스트레칭은 귀찮으니까. 이것저것 만져서 Nike Run Club 앱을 세팅하고 음악을 틀고 조금씩 달리기 시작한다. 하루키는 책에서 달리는 동안 그닥 잡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내 경우는 그렇게 하다가는 지루해서 쉽게 포기해버릴까봐 부러 이것저것 잡생각을 하는 컨셉을 잡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떄부터 알고 지낸 친구 K를 생각했다.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게 언제였더라? 그런건 잘 기억이 안나고 최근에 가장 무더웠던 날 "이따위 날씨에 지지 않겠어!"라는 피드와 함께 러닝한 사진을 올린 K의 인스타그램을 떠올렸다. 걔는 원래 그런 애였지. 워낙 스포츠를 좋아하던 애였고 승부욕이 대단했다. 나와는 반대되는 지점이 많았는데 예컨데 농구를 하면 나는 기막힌 패스 넣는걸 즐기는 타입이었고, K는 어떻게든 득점 올리는 걸 목표로 삼는 타입이었다. 그러고보면 그 친구는 혹시 단체 운동보다 개인운동이 더 맞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여름에는 러닝, 겨울에는 스노우보드로 가득찬 그의 피드를 보고 '역시 내 생각이 맞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걔 축구나 농구 피드도 가끔 올라오잖아?' 불현듯 뭔가 멋적어졌다. 세상 게으름뱅이가 어디 스포츠맨한테 이러니저러니 판단을. 하는 그 때 반환점을 돌았다.

달리기 할 때 듣는 음악이 은근히 중요한 것을 하루키의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 타입은 Jazz이지만 달리기를 할 때는 주로 올드락을 선호한다고.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핸드폰에 담긴 세계여행을 위해 만든 mp3들이었다. 가수, 장르, 템포에 상관없는 잡종을 셔플로 돌려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꽤 괜찮은 템포들의 음악들이 나왔다. 브루노 마스의 그루브한 팝이나, 자이언티의 끈적끈적한 음악들. 그 중 달리기 가장 좋았던 노래는 단연 BTS의 불타오르네 였다. 남미에 가게되면 BTS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넣었던 음악. 중간 중간에 낮은 목소리의 나레이션이 있고 약간의 텐션 후 뽜이어~ 할 때 웬지 힘이 붙는 느낌이다. 달리기의 노래라는 것이 템포도 템포지만 가사도 중요하다는걸 깨닫는다. 그런데 BTS 노래가 끝나고 김창완밴드의 'E메이저를 치면'이 나온다. 명곡인데 달리기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 특유의 그 우울한 목소리에 내 종아리도 함께 우울해 지는 느낌. 돌아가면 달리기 좋은 음악 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 외에도 '달리는 여자는 다 아름다운거 같아요' 하고 말했던 작가 김봉철도 생각났고, 중간에 보인 도봉구청건물이 너무 성냥갑같이 단조로워서 별로 안 이쁜거 같다는 생각과, 트랙에 설치된 안내 LED에서 태풍이 북상한다는 내용을 보고 '아 그러면 내일은 또 달릴 필요 없겠구나' 안도의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기타등등의 생각 중 또 길게 한 생각은 만약 기적적으로 내가 꾸준히 달리기를 한다면 적절한 보상시스템으로 지속성을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임처럼 레벨이 오르면 아이템을 하나하나 바꿔야지. 이런식이다. 4~5회 정도 꾸준히 달리면 브런치에 달리기 관련 에세이를 연재해야지, 10회 정도 달리면 러너에 맞는 러닝화를 사고, 30회가 되면 핸드폰을 팔에 고정하는 밴드를, 50회는 블루투스 헤드셋, 100회 기념 스마트워치. 자본주의와 함께 러닝욕구가 불타오른다. 그러다가 <달리기를 생각할 때...>를 추천해준 사람이 올 해 시카고 마라톤에 도전한다는데 '혹시 나도?' 하는 마음에 갑자기 뜀박질이 가벼워 진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물은 김치국이다. 김치국 한사발.

고작 40분 뛰어 놓고 이렇게 많은 생각을 했다고? 사람들이 주작이라고 생각하겠네. 하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하기 위해 달리는 걸까? 쓰기 위해 달리는 걸까? 확실한건 달리기 위해 달리는건 아닌거 같다.



다행이다. 내일부터 태풍이 온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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