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즌1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은
'세계일주를 다녀온 한 부부'가 서울시 도봉구 일대에서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일주 강연을 직접 기획해서 진행해보는 과정을 글로 남기는 프로젝트 입니다.
이 글은 시리즈의 마지막 글로서 아래의 <기획편>, <홍보편>, <컨텐츠편> 을 함께 읽어보시면 훨씬 좋습니다.
그럼 이 기획의 마지막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글은 다른 글들에 비해 조금 길게 작성되었습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홍보가 잘 된 것인지 10명 정원의 11명이 신청할 정도로 모객은 완벽했다. 토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PPT를 하나씩 맞춰 보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슬라이드를 하나하나 넘겨가며 멘트를 상의하는데 발표가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뭔가 축축 쳐지는 느낌. 노잼은 죄악인데 큰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멘트를 늘리면 구질구질 구차하게 설명하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사진 위주로 휙휙 지나가면 성의가 없어보였다. 우리 부부가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커플이었나? 되게 매력없는 세계일주를 한 것 같은 PT자료였다. "아침이라 졸려서 그럴거야" 하고 부러 서로를 위로했지만 증상은 있지만 원인을 모르는 신종 감기 바이러스처럼 불안한 마음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료를 다 갈아 엎을 수는 없었다. 이제 10시간만 지나면 죽으나 사나 강연을 해야했다. 누가 해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는, 스스로 기획하고, 제안하고, 홍보해서 사람들을 모은 강연이. 좀 더 매력적인 사진으로 몇 장 교체하고 집 근처에서 열린 Unlimited Edition에 다녀와서 낮잠 조금 자고 일어나니까 금새 10시간이 지나갔다.
형형색색의 등이 아름답게 빛나는 방학천 문화예술거리. 미리 할로윈 컨셉에 맞춰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마녀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아이들이 귀엽게 방학천변을 뛰어다녔다. 우리는 강연 1시간 전 보옴밤에 도착해 프로젝터를 연결하고, 깜짝 이벤트용 에그플랜트 딥을 숨겼다. 그리고 의자를 조절하는데 각이 쉽지 않았다. 5~6평 크기의 보옴밤은 사람들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하기 맞춤한 공간이었다. '세계여행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기획이었기에 아늑한 보옴밤의 공간은 딱 적당했지만 막상 발표를 하려고 프로젝터를 세팅하니 앞에 앉으신 분의 어깨가 걸릴 것 같았다. 혹시나 오시는 분들이 불편해하시지 않을까. 또 걱정몬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기대'에서 오는 걱정이었다. 무엇을 기대하나 이 이벤트 한 번으로 훅 떠보고 싶었던걸까. 혹시 나중에 이게 반복되면 비지니스 모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실질적인 기대였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아예 없다고 하면 100프로 거짓말이지. 기획부터 실행까지 오롯이 홀로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재밌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기에 모든 과정이 늘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부담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건 재미있는 일이야' 이 한마디가 자칫 민망할 수 있음에도 보옴밤에 제안을 해 볼 용기를 내게 했다. 카페 엉클두와 무중력지대에 포스터를 붙여달라고 부탁을 했고, PPT를 만들다가 새벽 5시에 잠들기도 했다. 왜 이런걸 하는걸까, 쓸데없는 일이기만 한건 아닐까. 하고 고민하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몸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머리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7시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요 앞에 S아파트에 살고 있구요. 작년 6월에 세계여행을 떠나 377일 동안 세계를 돌고 와서 이런 기획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S아파트에 삽니다 라는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며 토크를 시작했다. 막상 시작한 강연은 우리의 우려와 달리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사람들은 별로 퀄리티 높지 않은 우리 사진에도 놀라 주었고, 요상한 내 개그에도 피식해주시고 무엇보다 가장 큰 감동은 Q&A 시간에 지치지 않고 터져나오는 사람들의 질문세례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1개 이상의 질문을 해 주셨고 앞 다투어 손을 들고 물어보셨다. 우리가 가장 기대한 서로 소통하는 방식의 강연. 어떤 커플은 2시간의 긴 토크가 끝나고도 계속 서서 우리를 붙잡고 질문을 해 주셨다. 나름 설문조사도 준비했는데 다들 좋은 말씀만 써 주셨고 아쉬운 점에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라고 써주신 분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이 이벤트는 200% 성공이었다. 그 날 아침 우리 부부의 우려와 달리 실용성과 감성과 개그의 절묘한 3중주였다. 오늘이 이벤트가 끝난지 5일째인데 그 기간 동안 나는 나름 이 토크의 성공요인을 분석해 보았다. 성실한 PT 자료의 승리인가? 역시 내 개그가 먹혔나? 하는 근거 없는 추론을 하다가 나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그냥 오신 분들 덕분이었다"
그 분들은 그 곳에 오시기 전부터 마음이 열려 있었고 학예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처럼 우리의 재롱을 우쭈쭈쭈 봐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가 개봉하면 그 영화가 더 이상 감독의 것이 아닌 관객의 것이 되는 것처럼 이번 강연은 내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준비한 재료들을 가지고 오신 분들이 신나게 요리를 해 먹고 품평을 하고 뜯고 씹고 맛보고 즐겨주셨다. 음 여기까지만 까불어야지. 겸손은 내 전공이 아니니까. 제 전공은 프랑스어 입니다.(부전공은 언론학. 악! 이제 그만!!!)
Epilogue
약속 드린대로 다음날 바로 강연 PPT를 보내 드리고, 모든 분들의 인스타를 팔로우했다. 인팔은 '관리' 차원이라기 보다 순수하게 그 분들의 삶이 궁금해서였다. 한 분 한 분 SNS를 염탐하며 그 날 우리가 만났던 첫 인상과 조금 다른 모습들을 온라인에서 훔쳐보는 맛이 있었다.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요~" 하고 강연의 마지막 멘트를 날렸었는데 온오프라인에서 관심 갖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추가했으니 이 기획은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여행자의 비교의식 때문에 시작한 기획' 이라고 <기획편>에서 밝혔는데 이제 누군가 '여행이 너에게 무엇을 남겼어?' 라고 물으면 자신있게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같다. 어설픈 영어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던 세계의 친구들, 여행 중 만난 다양한 한국 여행자들. 특히 원희씨. 다녀와서 우리 이야기 들어준 친구들, 인스타의 인연으로 직접 만나 내 진로에 적절한 어드바이스 해준 민정님 그리고 엄청 착하게 이 기획을 살뜰히 챙겨주신 보옴밤 대표님과 오신 모든 분들이 내 377일 세계일주의 자산이구나. 읔! 이런 오글거리는 시상식 소감같은 말투를 쓰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그만. 이래서 이 브런치가 인기가 없는거. 흥칫뿡! <우리 동네에 세계여행자가 산다> 시즌 1 여기서 일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