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정환Juancho Dec 28. 2022

록이 트로트보다 위입니까?

이제야 고백하지만

어릴 적 나는 병에 걸렸었다.


티는 안 났지만 중증이었고,

마땅한 약도 없어서 초중고 내내 끙끙 앓았다.


지금도 완치되진 않은 것 같다.

병명이 뭐냐면


'홍대병' (...)


내 어린 시절을 채워준 앨범들


소몰이 창법과 락발라드가 난무하던 학교에서

난 힙합을 듣는 몇 안 되는 학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당시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자부심이 넘쳤다.


신기해하고 뭐 듣냐 묻는 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상하게 봤다. 그러든 말든, 쉬는 시간엔 이어폰을 꽂은 채 랩을 중얼거렸다. 아! 노래방에 가면 '다이나믹듀오 - Superstar'를 불렀다. 벌스와 훅을 혼자 다 뱉을 때의 쾌감이란. "슈퍼스타는 죽었어, 느끼니? Feelin it, 힘든 몸 이끌어 가, 느끼슈?"


'하... 나 멋있네'


... 지독한 병에 빠져 있었다.


스무 살이 되고 병세는 약화되었지만 매니아적 취향은 그대로. 피디가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포크/락/힙합 러버. 팝, 아이돌 음악, 소위 말하는 TOP100 차트엔 흥미를 못 느꼈다.


물론 안중에도 없었던 게 트로트다.


송가인이나 임영웅 정도만 알았다.(엄마는 임영웅님, 아빠는 송가인님 왕팬이다) 우리나라에 나오는 신규 프로그램들을 다 챙겨봐도 '트로트'가 붙으면 보지 않았다. 짜피 내용은 뻔할 것 같아서.


'트로트' 하면 퀴퀴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굳이 구구절절한 빛바랜 벽지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다. 내심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나보다.


그러나 <우리들의 쇼10>을 하면서

80분짜리 프로그램을 주 10회는 반복해서 봐야 했다.


자막 쓰 마커 찍고 CG 요청하.

색이 잘 뽑혔는지 확인하면서 잘못된 내용은 없나 검수했다.


그렇게 몇 달 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은


트로트도 엄청나게 매력 있다는 거.

정말 좋은 노래와 가수들이 활동 중이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퍼포먼스가 좋은 출연자 A.

B 출연자는 노래를 너무 잘한다.

C 곡은 나도 모르게 계속 흥얼거리게 된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트로트 곡이 한두 개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채널들이 왜 그렇게 트로트로 뇌절을 하는지

그놈의 시청률은 왜 여전히 높은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예능에서 웃고 넘겼던 장면이 떠올랐다.

"락이 트로트보다 위입니까?" 날카롭게 나를 향한다.


사실 폴 메카트니는 저런 말 한 적 없다고 한다...


이번에도 나의 편협함을 발견.

물론 힙합과 포크가 젤 좋다는 것엔 변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과 마음의 문을 더 넓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