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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있는 것'에 대한 단상

선암사, 종교, 그리고 말 없는 반려동물

by 조정환Juancho

순천까지 가서 하고 싶던 건, 그게 뭐든 '벗어나는' 것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간 너무 많이 엮여있는 상태로 지내서, 좀 고요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선암사. 막연히 절에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한 방에 가는 버스도 있어 나는 조식도 먹지 않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오늘은 생각을 비우고 마냥 걸어보는 날이야.'

마을버스에 올라 다짐하고 한 시간쯤 졸다가 선암사 매표소에 도착했다. 그렇게 걷기를 시작하는데


... 근데 왜 익숙한 풍경 같지? 어디서 본 것 같다.


헐. 잊고 있던 사실이...

4년 전 난 이곳에 머물렀었다. 것도 템플스테이로 3일이나!


2020년 여름, 난 교양PD 지망생으로 방송사 공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지망생들이 그렇듯 나도 절박했다.

PD에 도전한 지 햇수로 3년째였고, 직전 연도(19년)엔 1지망이었던 SBS 교양PD 신입 채용에서 최종까지 갔다가 떨어진 상황. '이번엔 꼭 붙어보리라' 하며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당시엔 방송사 채용 공고가 주로 하반기에 떴기에, 그 여름이 숨 고르기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기도 했다.


그러니까 'SBS 교양PD 공채 최종 합격'을 희망하던 나는 별안간 '템플스테이'를 발견,

생전 가본 적도 없던 절에 찾아갔었다. 그곳이 선암사였다.

그걸 매표소에 도착할 때까지 기억 못 하고 있던 것이다....


그때 난 템플복을 입고 절밥도 먹고 스님과 차담도 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더랬다. 큰스님이 누구셨는지나 하루 스케줄이 어땠는지...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발을 디딜수록 기억이 되살아났다. 많은 것들이 여전했다.

목탁 소리와 연못의 색깔, 하늘의 풍경 화장실 가던 길과 그 옆에 있던 자판기, 심지어 음료냉장고 위치까지 '틀림없이' 그때 그대로다. 하늘도 이렇게 퍼랬던 것 같은데?


고작 5분 만에 4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때 난 차분한 척했지만 솔직히 너무나도 불안해서, 뭐라도 위안받고 싶어 귀 쫑긋 하고 스님 뒤를 졸졸 쫓아다녔는데. 하하. 4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힘들어 온 데가 우연히 같은 곳이라는 게 신기했다. 덕분에 목적 없이 사찰 구석구석을 살폈다.


출처: 순천시, 선암사


한 바퀴를 돌아보고 연못을 다시 보고 있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을 때가 돼도 여긴 그대로지 않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안도감이.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들 변한다는데, 그리고 나도 변하고 내가 했던 것들도 다 까먹고 있는데, 그렇게 불안해할 때 찾았던 그 절이 여기 그대로 있어주었구나~' 하는?


그러고 보면,

요즘엔 '그대로 있는 것'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 같다.

같이 붙는 단어들도 '수구', '고인물' 같은 것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대로 있는 것'이 주는 편안함에 굴복하고 싶었다.


대학생 때, 종교인을 이해하고 싶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읽은 적이 있다. 추천한다.


종교는 어째서 인류 역사 내내 번영했을까. '그대로 있어서'는 아닐까.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만, 진리는 안 변한다는 믿음. 그건 우주에 놓인 인간이, 매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아줄이었을지 모른다. 생존을 위한... 수많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살고 죽었다. 그리고 죽였다. 심지어는 이 순간도 싸운다. 지금의 모습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종교가 품으려는 가치는 불변이니까. 누군가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 부르던데. (종교에 대해 무지해서 쓰는 표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쾌하신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니, 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종교 권력이 약해진 요즘 '그대로 있는 것'의 역할을 대신하는 게 반려동물 같은 존재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냥이 한 마리 들여본 적 없는 나로선 항상 그게 의문이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왜 절대적일까?


집 앞 공원에서건 동물원에서건 SNS에서건 사람들은 하나같이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난 그게 조금 무섭게 여겨졌다. 어째서 저렇게 무비판적으로 애정할 수 있지? 쟤는 다리가 기네, 털이 맘에 안드네 이런 식으로 재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뻐한다. 같은 생명인데, 직장이든 가족이든 타인은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면서. (말해두지만 전 지극히 인간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동물이라면 인간이 부담스러울 것 같다. 사실 이미 싫어할지도 몰라. '왜 지멋대로 판단하는 거야' '챙겨달라 한 적 없잖아!' 하면서.


언제 한번은 현주에게 고양이/강아지가 왜 그렇게 좋은지 물었더니, '무해하잖아'라고 답해주었다.

아하, 맞네. 정말 동물은 딴소리하지 않는구나.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언어'를 못하는 거지만...) 반대로 인간은 맨날 지 좋은 대로 지껄일 뿐이다. 한껏 뽐내면서.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 서로 헐뜯고 뱃겨먹을려고나 하고. 그니까 내 영역 안에서 그대로 있어주는 반려동물에 웃고 웃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보니 열한 시 반.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시간이다.


언제 여기를 다시 오게 될까?

어쩌면 다시는 못 올지도 모른다. 선암사는커녕 순천에도.

하지만 아마 기회가 생긴다면,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을 것만 같다.


목탁소리가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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