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1989년의 음악을 한다는 것
고흐로 한번 살아볼래?
신이 내게 이런 기회를 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음... 아니요. 천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쯤 해봤지만... 그래도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다. 그는 생전에 무척 외로웠을 거다. 지금이야 고흐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때는 열심히 그린 그림 아무도 봐주지 않고, 친척들에게 개무시당하고...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는 운명. 우울증이 없는 게 이상하다. 팔리지 않는 고통은 아프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흐가 살아간다. 이 사람 천잰데! 너무 좋은데! 잘 됐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 우연히 집어 든 책, 노래, 영화, 인터넷에서 발견하는 이름 모를 고흐들. 내게는 기린이 그런 존재다.
기린은 뉴-잭 스윙(New Jack Swing)을 하는 뮤지션이다. 뉴-잭 스윙은 힙합에 R&B가 섞인 장르인데, 내 생각에는 가사보다는 리듬, 멜로디가 더 돋보이는 음악. 멜로디는 부드러운데 리듬은 강해 춤추기에 좋다. 한국에선 듀스의 음악으로 알려졌다. 90년대에 유행했다. 기린은 복고인 듯, 재해석인 듯, 독보적인 음악을 한다. 들어보면 안다.
대중문화 씬에서 복고는 정말 잘 먹히는 콘셉트이다. 패션과 스타일은 물론, 방송도 이를 적극 이용한다.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도 tvN <응답하라> 시리즈, JTBC <슈가맨>, MBC <무한도전> 토토가... 지겨울 만도 한데 매번 팔리는 이유는 아마, 복고가 추억과 공감을 동반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새로운 팬층이 생기기도 한다. 어린 세대가 보기엔 이런 복고는 ‘힙’해 보인다.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
하지만 복고가 한창 팔릴 때도 ‘복고스러운’ 기린의 음악은 주목받지 못했다. 아이러니다. 처음에 기린을 알게 됐을 때 짜릿했다. 이런 뮤지션이 있다니, 대박이군! 금방 뜰 거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앨범이 나왔지만 별 반응이 없다. 슬슬 불안. 나는 그와 관련도 없는데, 심지어 그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는데, 나만 괜히 초조해지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만 두면 어떡하지, 기린 더 떠야 하는데, 계속 앨범 나왔으면 좋겠는데...
‘신곡에 대한 반응이 두려워요.’
종종 마주치는 히트메이커(이를테면 ‘음원깡패’라고 불리는 가수들)의 인터뷰가 의외로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음악이 우리에겐 취미일 뿐이지만, 뮤지션에겐 생업이기 때문이다. 대중 뮤지션에게 인기는 밥벌이 수단이다. 그런데 인기는 바람과도 같아서 있다가도 없는 법. 성공은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스타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탄생한다. 대중의 냉엄함은 현장에 있는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언젠가는 대중문화에 발을 걸치게 될 나도 괜스레 긴장이 된다.
문득 3년 차 마케터인 친구 녀석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건 마케팅이야~”
인터넷에서 마케팅 전략을 짜는 이 놈 - 장기하 편에 출연한 적이 있다. 불알친구, 그 놈이다. 참고 링크 –
https://brunch.co.kr/@juancho/5 - 은 만날 때마다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업계는 전쟁터이고 자기는 매일 승부사가 된다나. 본 적이 없으니 그 모습이 잘 그려지진 않지만 묘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요즘 시대에 빛을 보려면 상품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기운’을 타야 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마케팅이란다. 실제로 이 녀석 회사가 파는 안마기가 있는데, 엄청나게 인기가 많다. 그 비결이 SNS 마케팅.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투브에 시도 때도 없이 광고가 나온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한번 사보는데... 성능이 괜찮다! 그럼 추가 구매를 한다. 그때부터 매출의 선순환이 시작. 마케팅이 그 최초의 구매를 유도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걸 못하는 상품은 평가받을 기회도 못 얻고 사장된다. 나도 경영학 교양 수업 정도는 들어봤는데... 새롭게 들린다. 이 놈이 괜히 돈 버는 게 아니다 싶기도 하고.
그렇다면 기린은 어느 쪽일까. 기회를 못 받은 쪽일까, 아님 이미 대중성이 없다는 선고를 받은 쪽일까. 아니, 그건 그렇고 기린은 가만히 자기 음악하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 난리일까.
그렇다. 기린을 향한 우려와 응원은 결국 또 나를 향해있다.
나는 대세와 트렌드라는 말을 싫어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일단 거부감이 든다. 남들이 좋아하는 걸 내가 따라 좋아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 얼핏 들으면 개소리라도 자기만의 색깔을 가졌다면 그게 더 좋다. 능력보다 매력을 택하고, 매력도 마이너한 매력을 좋아한다.
그런 내가 대중을 상대하는 PD에 적합할까.
자소서를 쓸 때도, 필기와 면접을 볼 때도 문득 불안해진다. 어쨌든 나는 회사에 뽑혀야 하는데 이런 취향을 회사는 마냥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내 안목이 잘 안 팔릴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마케팅을 해야 하나? 저 응원단에서 행사도 만들어보고 흥행도 시켜봤는데요. 진짜 자신 있는데요! 라고 말해도 그게 닿을지 잘 모르겠다. 방송국을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다. 열심히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관심도 없으면 어쩌지? 그건 정말이지 모르는 일이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자신감 넘치지만, 나는 솔직히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조용히 기린 노래를 튼다.
다시 생각한다. 와 미쳤네, 너무 좋아. 마음을 고쳐먹는다. 기린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뮤지션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에 대한 글을 정성스럽게 쓰는 나 같은 팬이 있다.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기린은 엄청 인정받고 있다.
이런 나와 잘 맞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와 함께 일하는 게 즐거울 동료, 내 프로그램을 보고 ‘와 미쳤네, 너무 좋아.’라고 생각해 줄 시청자가 분명 있다. 그렇게 믿으며! 오늘도 읽고 쓰고 생각한다. 얼른 일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