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야 한다
이경규는 ‘예능의 끝은 다큐멘터리’라고 말했다. 지금이 그 끝으로 가는 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큐스러운 예능이 많다. 리얼이라는 단어는 꼭 붙고, 일상을 관찰한 VCR도 필수. 출연진이 스튜디오에 앉아 관찰 영상을 보며 토크하는 게 보통이다. tvN <숲 속의 작은 집>처럼 아예 다큐를 표방하는 나영석 식 예능도 있다. 아무래도 이런 콘셉트의 강점은 ‘자연스러운’ 웃음. 연출과 설정에 질린 시청자들이 특히나 좋아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마음은 복잡하다. 다큐식 예능이 대세라지만 정작 정통 다큐는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업계 종사자에겐 큰 문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팔리지 않으면 꽝이다. 시청률이 안 되니까 지원이 끊기고, 제작비가 없으니 환경은 더 열악해지기 때문이다. 악순환이다. 내가 다큐멘터리 PD라면 다큐식 예능의 성공에 샘 날 것 같다. 밥그릇 빼앗긴 기분이 들지 않을까? 다큐멘터리는 시사교양의 핵심이다. 다큐 뺏기면 시사교양은 뭐 먹고 살라고.
다큐멘터리의 의의나 필요성을 여기서 말하고 싶진 않다. 그냥 현실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팔리지 않는 고통, 그 세 번째 이야기다. (참고: 1탄 ‘EBS’ https://brunch.co.kr/@juancho/14, 2탄 ‘기린’ https://brunch.co.kr/@juancho/15)
크게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첫째, 새롭지 않다.
‘너무’ 좋은 세상이다. 클릭 한 번이면 온 세상 이야기를 알 수 있다. 인터넷에 웬만한 정보가 다 있다. 궁금한 정보부터 불편한 진실, 사회의 부조리, 자연의 신비함까지. 구글이나 유투브에 ‘trash island’만 쳐도 인간이 얼마나 지구를 망가뜨렸는지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엔 콘텐츠도 플랫폼도 변변치 않았다.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졌는데 순천 시민은 모르던 시대. 그 시절 다큐멘터리는 세상을 보는 창이 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굳이 정제된 다큐멘터리를 볼 필요는 없다.
둘째, 재미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유희’가 아니다. ‘흥미(Interest)’에 가깝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3년 전, 이세돌-알파고 대국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인기였다. 한 번도 웃긴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이세돌 기사는 얼굴을 찡그리고만 있는데! 인기의 비결은 궁금증과 관심이다. 시청자는 궁금하기 때문에 봤다. 바둑에서 인간을 이긴다고? 이제까지 못 보던 그림이다. 사실 내 이야기라서 궁금하다. 저런 A.I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는데... 뭐라도 대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마음이라면 다큐멘터리가 당긴다. 제작진의 오랜 관찰과 조사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다큐멘터리를 나와 상관없는 유익한 프로그램 정도로 여긴다. 그러니까 궁금하지 않고, 별 관심이 없다.
결론. 새롭고 흥미로워야 한다. 문제를 파악했으니, 나름의 해결책을 던져보려 한다.
“야, 이놈아. 그게 다큐멘터리냐?”라고 욕하지 마시라. 처음부터 말했다.
‘변칙 작전’이라고.
유명인을 내세우는 것이 첫 번째 작전. 직접 출연시키거나 더빙을 맡기는 식이다. SBS <나를 향한 빅퀘스천>을 보자. 같은 결혼 이야기라도 윤시윤 님이 전달하면 달리 들린다. 중국에 가서 중매를 체험하는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기존 시청층은 물론이고, 평소에 다큐를 보지 않던 윤시윤 님의 팬들도 한 번은 시청할 것이다. 어떤 그림일지 궁금하니까. 한 회를 보고 호기심이 생기면, 관련 프로그램을 더 찾아볼 테고.
예능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캐릭터 중심으로 흘러가는 예능과 달리 (휴먼 장르를 제외한) 다큐멘터리에선 아이템과 메시지가 메인이다. 따라서 유명인의 역할은 중개다. 제작진의 목소리로는 시청자에게 도무지 닿지 않으니 더 매력 있고 파급력 큰 유명인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출연자는 종종 프레젠터라 불린다.
‘캐스팅’ 작전은 이미 진행 중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시사교양 전반에서 활용되고 있다. ‘박보영 님 덕분에 좋은 내용 알게 됐습니다.’라는 의견은 봤어도, ‘박보영 씨가 다큐를 망치네요.’라는 의견은 못 봤다. 그러니 제작진이 유명인 카드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포맷을 만드는 게 두 번째 작전이다. ‘기록’을 의미하는 다큐멘터리에 웬 포맷이냐고 할 수도 있다. 설정도 이런 설정이 없다고. 껄끄러울 것 같아 다른 이름을 준비했다.
‘실험 다큐’ 혹은 ‘게임 다큐’
제작진이 가상공간을 만들고, 출연진이 체험한다. 그 과정을 기록한다. 가상공간은 거창한 세트장이 될 수도 있고, 사소한 장치가 될 수도 있다.
SBS <인생게임-상속자>는 전자에 속한다. 가상 세계에 들어온 9명의 출연자는 각자 '계급'을 뽑는다. 흙수저부터 금수저까지 있다. 계급에 맞게 생활하며 미션을 수행하고 그에 상응하는 가상 화폐를 버는 일상. 4일 동안 가장 많은 돈을 번 우승자가 상금 천만 원을 탄다. 각종 횡종연합과 계급 간 갈등이 이어지고 카메라는 기록한다. 가상공간이라는 설정이 가진 재미가 쏠쏠하다. 사람들은 쉽게 대한민국을 떠올린다. 이러쿵저러쿵 출연진을 평가하거나 그 입장에 몰입해보기도 하며 즐길 수 있다. 대한민국의 병폐를 되짚으며.
SBS 스페셜 <아빠가 임신했다>나 <취준진담> 편은 후자다. 남편이 임부복을 입고 며칠 동안 생활을 하거나 취준생과 면접관이 역할을 바꿔 면접을 본다. 색다른 그림이 만들어진다. <상속자>에 비해 몰입도는 떨어지지만 제작비가 적다. 소재가 미시적이어서 메시지 내기도 수월하다. ‘임산부의 삶은 정말 힘드니까 배려합시다.’ 라거나 ‘취준생에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건 불합리하다.’처럼. 출연자끼리 공감대를 만들어주는 건 덤이다. 아름답다.
‘포맷’ 작전은 첫 번째 작전에 비해 공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작전을 많이 보고 싶다. 내가 만들고 싶은 ‘캐릭터 버라이어티’가 이런 맥락이기도 하고.
나는 아직도 고민한다. 예능과 시사교양, 두 장르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를. ‘제작PD’라며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지상파는 칼같이 나누기 때문에 결심해야 한다. 솔직히 별로다. 글쎄, 요즘 같은 시대에 장르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가... 탐사보도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연하게 모집해도 되지 않나 싶다. 하소연이다, 하소연... 뭘 모르면서 불만이냐 하시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요즘 같은 시대에.
요즘 같은 시대에 다큐멘터리가 중요한가? 인기도 없는데... 나는 그럼에도 다큐멘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이 넘치는 시대지만 기록이 여전히 필요하다. 불편한 진실이 많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 다만 항상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옷장을 여니 몇 년 전 옷들이 가지런하다. 정말 소중해 버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오래돼 꺼내기도 머쓱하다. 이대로 묵혀 둘 텐가. 나라면 몇 개는 꺼내 리폼을 헐 거다. 변칙 작전을 쓴 프로그램들이 정통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