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분 마치 디스코팡팡
호기심에 1화를 눌렀던 게 저번 금요일. 그런데 주말에 10화까지 몰아봤고, 어제는 본방사수했다. 드라마를 즐기지 않는 나도 단숨에 빠져들었다. 이 미친 몰입감. <SKY캐슬> 얘기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는 뭔가 다르다고 하던데. 그게 뭘까 싶어 고민해봤다. 음...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 좀 다른 것 같다. 인기의 비결이 거기에 있을지도.
구경 중에 으뜸은 싸움 구경이라는 말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야기꾼이 퍼트렸을 거다. 그만큼 드라마에선 싸움이 필수다. 가장 익숙한 조합은 주인공과 악당. 흥부와 놀부, 배트맨과 조커, 어벤저스와 타노스, 언제나 한 짝이다. 보통 정면으로 부딪힌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인 셈. 팥쥐는 굳이 놀러 가기 전 콩쥐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타노스는 비전의 스톤을 빼앗으며 통일을 이룬다. 한쪽이 뜨면 반대쪽은 가라앉는다. 등장인물은 시소처럼 움직인다.
선과 악으로 나뉘는 구도가 가장 흔하다. 해리포터 군단이 왼쪽에 서면 볼드모트는 오른쪽인 식. 응용 전략도 있다. 악역이었던 놈이 마음을 바꿔 먹어 착해졌다거나 착한 놈이 알고 보니 나쁜 놈이었더라는 이야기. 충격실화! 스네이프가 나쁜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포주의)
결국 시소가 완전히 기울면서 끝난다. 처음엔 악당 쪽으로 기울다가, 점점 주인공의 힘이 커져 시소가 팽팽해지고, 등장인물들이 시소 위에서 왔다 갔다 한다. 그러다 주인공 쪽으로 기울며 마무리.익숙하고 보편적인 권선징악.
하지만, 스카이캐슬은 시소 모양으론 설명이 안된다.
회차마다 갈등 구도가 달라진다. 처음에 곽미향(염정아)은 이수임(이태란)과 맞붙는다. 김주영(김서형)과 손을 잡고 이수임을 내친다. 그러나 다음 화에 이수임은 김주영에게 연민을 느끼고, 곽미향은 딸 예서(김혜윤)를 흔드는 김주영의 뺨(!)을 때린다. 하지만 다시 곽미향은 김주영에게 의지하고 이수임을 외면한다. 곽미향과 혜나(김보라)의 관계는 어떤가. 둘은 합의를 했다가 다시 으르렁거린다. 조연들도 죄다 이런 식이다. 이건 뭐...
마치 옥타곤 위에서 싸우는 것 같다.
시소는 편이 나눠지는데 여기선 그런 거 없다. 누가 왼쪽이고 누가 오른쪽인지 구분이 안되기 때문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시청자는 가치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수임이 정의로운 건 알겠는데 곽미향이 이해된다. 혜나가 불쌍하지만 예서한테 하는 행동을 보면 왜 그렇게 얄미운지. 강준상(정준호)을 보면 열받지만 윤여사(정애리)를 생각하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인터넷에 <SKY캐슬>의 인물이 입체적이라는 평이 많다. 나는 캐릭터가 특별히 달라서라기 보다는, 옥타곤 모양의 싸움판 덕이라고 생각한다.
뜬금없지만 FPS(1인칭 슈팅게임) 배틀그라운드(이하 배그)의 전투 방식이 <SKY캐슬>의 갈등과 비슷하다. 배그는 출시와 동시에 FPS계를 평정했는데 그 핵심 비결이 배틀로얄. 기존 게임들은 항상 레드와 블루로 팀을 나누고 진행하는데, 배그는 팀이 없고 개인전이다. 자신을 제외하면 모두 적이고, 필요에 의해 팀이 짜여져도 임시 동맹 정도에 불과하다.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상대들이 예고없이 튀어나온다. 10판을 하면 10판 다 다르다.
이쯤에서 묻자. 지루함은 어디서 오는가. 예측 가능할 때다. <SKY캐슬>은 예측이 어렵다. 시소 위의 전개는 뻔하지만, 옥타곤 위는 알 수 없다.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러니까 안 보고는 배길 수 없게 된다.
PD지망생 사이에는 '드라마 모니터링은 4회까지만'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로그라인, 인물 관계도, 갈등 구조 등 드라마의 핵심 요소는 초반부 안에 다 나오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SKY캐슬>은 예외다. 중반부는 돼야 흐름과 구조가 잡힌다. 심지어 마지막회 예고에도 떡밥이 나왔다. 시청자는 미칠 노릇이다.
그렇다. <SKY캐슬>은 등장인물을 옥타곤 위에 올려 배틀로얄 시키는 드라마인 것이다.
시소가 1차원이라면, 옥타곤은 2차원이다. <SKY캐슬>이 기존 드라마보다 입체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물론 이 또한 드라마일 뿐,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3차원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여담인데, 예능이나 시사교양에선 이런 판을 만들기가 힘든 것 같다. 러닝타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나 관찰 예능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을 담는다. 하지만 70분 안에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예전 MBC <무한도전>처럼 호흡이 긴 경우에야 추격전이든 장기 프로젝트든 옥타곤이든 디스코팡팡이든 만들어 낼 수 있지 않나 싶다.
드라마PD를 꿈꿔본 적은 없지만 드라마의 매력을 얼핏 느꼈다. 긴 호흡 속에서 1차원 세계를 3차원까지 끌어내는 작업. 재밌을 것 같다. 스토리를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옥타곤과 디스코팡팡을 떠올려보자. 충격과 공포의 꿀잼 콘텐츠가 나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