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재개한다면 <슈퍼밴드>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자님의 요청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내 생각이 궁금하다고 하셨다. 네, 당연히 씁니다. 그런 요청을 받아본 적이 없다. 거절만 당하는 게 일상이라. 독자분의 요구 언제나 환영입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슈퍼밴드>를 9화까지 봤다. 씨 없는 수박이 떠올랐다.
수박에는 씨가 있다. 귀찮을 때도 있지만, 대개 군소리 없이 먹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수박에 씨가 없으면? 환영할 사람도 있겠지만 뭔가 허전할 것 같다. 수박씨는 그런 존재다. 방송 프로그램에도 씨가 있다.
스토리텔링을 위한 세 가지 씨
성공하는 스토리텔링에는 3C가 있다고들 한다. Character(캐릭터), Conflict(갈등), Curiosity(호기심)다. 시청자를 붙잡기 위해, PD는 이를 연출에 적극 활용한다. 출연자에게 캐릭터를 부여한 후 누가 이길지 모르는 싸움을 붙인다. 그러면 별거 아닌 일도 극적인 드라마로 바뀐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은 3C의 집약체였다.
Character. ‘키 작은 배관공 슈퍼마리오 허각 우승’, ‘강백호 같은 스무 살, I.O.I 김소혜’.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스타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잘난 사람은 별로 없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거나, 남모를 아픔을 갖고 있다. 연출자의 픽이다. 무대는 3분 남짓인데,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데 20분을 쏟는다. 효과는 확실하다. 시청자는 무대 뒤 그들의 사연과 노력을 보면서 감동받는다. 올라가면 환호를, 떨어지면 연민을 보낸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캐릭터가 남는다. (출처: Mnet)
Conflict. 뽑히고 뽑는 게 오디션이다. 연출자는 '대결' 포맷을 여기에 붙인다. 팀을 만든 다음 단체전을 붙이거나, 미션을 주고 한 명을 떨어뜨리는 식이다. 이러면 텐션이 생긴다. 출연자는 최선을 다해서 싸운다. 구경하는 시청자는 재밌다. 느긋하게 싸움을 본다. 누구와 누구가 붙는다더라, 입소문 내기에도 좋다.
This is competition! (출처: Mnet)
Curiosity. ‘60초 후에 공개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MC의 멘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 이번 주 탈락자는? 60초 후에...! 꼭! 이럴 때 끊는다. 더 보게 만들기 위한 장치다. 이런 편집도 쓴다. 프로그램 초반부, 우승후보 A와 B의 경연을 보여준다. 박빙...! 심사위원들이 말한다. 와, 진짜 어렵네요. 그렇다면 결과는? 갑자기 C와 D의 경연으로 넘어간다. E와 F, G와 H의 경연이 나올 때까지 감감무소식. 한 시간쯤 지났을까, 프로그램 끝나갈 때 A와 B가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결과 발표. 시청자는 A와 B의 결과를 기다리다 끝까지 본다. 제작진의 대성공.
하지만 씨가 너무 많으면 삼키기 힘들다. 시청자는 불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에 오디션 프로그램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악마의 편집’이나 ‘선정성 논란’이 따라왔다. 3C가 더 이상 재미와 감동을 주지 못하는 상황. 스토리텔링 실패다, 어느 순간부터 오디션 프로그램은 힘을 잃었다.
<슈퍼밴드> 제작진의 우장춘 프로젝트
그런데도 JTBC는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를 만들었다. 뭐가 다를까, 까보니 씨가 별로 없더라.
Character?흔한 가정사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A는 유명인의 아들이고 B는 10년 무명으로 고생했다더라 같은 뒷이야기가 나올 법도 한데, <슈퍼밴드>는 관심이 없다. 일례로, 출연자 중에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이 있다. 이 분은 ‘대리암’, ‘F=ma’ 같은 과학을 담은 자작곡을 부른다. <슈퍼스타K> 제작진이라면 분명 교실까지 찾아갔을 거다. 차분하게 강의 준비하는 모습, 꼼꼼히 수업하는 모습, 그리고 학생들의 인터뷰... 그리고 밤엔 180도 다른 선생님의 모습! 5분은 족히 채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장면 <슈퍼밴드>엔 없다. 그저 무대다.
나의 원픽.... ㄴr....는 ㄷㅐㄹㅣ arm....☆ (출처: JTBC)
Conflict&Curiosity? 갈등도 줄였다. 억지로 라이벌 구도를 세우지 않고, 경연만 간결하게 보여준다. 탈락 장면도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르다. 길게 끌지 않는다. 개개인의 인터뷰도 없이, 퇴장하는 탈락자의 뒷모습을 담는 게 전부다. 애초에 시청자의 심금을 울릴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흐름도 단순하다. 밴드를 구성한 후 경연, 그리고 결과 발표. 경연이 모두 끝나면 탈락자 발표. 정직하다.
근데 밋밋하지 않을까. 씨가 없으면 허전할 텐데... 바로 이 지점이 제작진의 승부수다.
씨 파낸 자리에 음악 세 스푼
<슈퍼밴드>는 음악에만 집중한다. 포맷부터가 그렇다. 제작진은 라운드별 '프런트맨(밴드 리더)'만 선정하고 뒤로 빠진다. 팀원 구성이나 선곡에 개입하지 않는다.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다.
편집의 기준도 음악이다. 'ㄱ와 ㄴ가 경연을 준비하다가 다퉜다, 서로 사이가 안 좋다, 심사위원 앞에선 티를 내지 않는다.' 이런 거엔 관심이 없다. '기타 3명이 같이 연주할 때 어떻게 파트를 나눴는지', '어떤 주법으로 연주했길래 이런 소리가 나는지', '첼로와 일렉 기타를 자연스럽게 섞으려면 뭐가 필요한지'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자잘한 부분도 마찬가지. 무대를 할 땐 무대만 보여준다. 무대 외 비디오&오디오를 끼워넣지 않는다. 통편집을 하면 했지 무대 RT를 줄이지 않는다.
다양한 음악이 시청자 앞에 뷔페처럼 차려진다. (출처: JTBC)
그렇게 <슈퍼밴드>는 전문적인 음악 이야기로 100분을 채운다. 연출의 무게중심을 3C에서 음악으로 완전히 옮겨 놓은 것이다. 승부수가 어느 정도 먹힌 것 같다. 엄청나게 화제가 되지도 슈퍼스타가 탄생하지도 못했지만, 시청률은 꾸준히 오르고 있고 확실한 팬덤도 생겼다.
씨 없는 프로그램의 상품성
모니터링 하는 내내 들던 생각,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덜 대중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이렇게 무자극 연출을 할 수 있구나. 그 시도가 재밌게 느껴졌다. 정말 감탄했다. 뭘 믿고 과감하게 시도했을까?
아마도 변화를 감지한 게 아닐까. 이제는 대중이 '다양한 음악'을 충분히 즐길 준비가 됐다고 제작진은 생각했을지도.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에 이 프로그램이 나왔더라면 망했을 것 같다. 이렇게 능력 있는 뮤지션들을 모으지도 못했을 것이고, 모았더라도 '그들만의 리그'로 남았을 것 같다. 2009년은 힙합이 마이너 장르이던 시절이다.
회사(JTBC)의 믿음, 전략, 장기 계획도 큰 힘이 되었을 거다(이 소재는 다음에 진지하게 한번 생각을 정리해서 써볼 생각이라 여기까지). 하여튼 <슈퍼밴드>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얼마 전 토익 시험 봤다. 작문 스터디를 시작했다. <미리쓰는 제작노트>도 계속 쓸 거다. 장르불문 프로그램 많이 보는 게 내겐 공부다. 더 생각하고 많이 말해봐야 한다.
공채 시즌이 곧 다가온다. 정말 한 방이 필요하다. 신이시여 저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사실 무교임;;). 저 힘들어요. 올해는 정말 방송국의 월급을 받고 싶다. 나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으랏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