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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환Juancho Sep 12. 2019

일본인 한 명이 나를 불러 세웠고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 현실에서


시국이 이런데, 일본인 한 명이 좋아졌다.

시국이 이렇지만, 그 일본인이 글 주인공이다.

시국이 이러니까, 이런 얘기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어느 낯선 만남


한 일본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의 이름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쉽지만 직접 만난 건 아니다. 도서관에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책을 빌렸다. 일방적 관계. 그는 나를 전혀 모른다.


히로카즈는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기생충>이 받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그보다 1년 전에 <어느 가족>이라는 작품으로 탔다. 그럭저럭 재밌게 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도 그의 작품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그의 영화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


유명하다는 이유로 호감을 느낀 건 아니다. ‘거장’이 했던 ‘PD로서의’ 고민을 엿보는 게 재밌었다. 참고로 히로카즈는 TV 다큐멘터리 PD 출신.


PD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정말 정말 현직 PD들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애초에 그들이 쓴 책이 별로 없을뿐더러, 세상에 나와 있는 거라고는 짤막한 인터뷰 기사들이 전부기 때문이다. 흔히 ‘PD는 프로그램으로 말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프로그램으로 PD의 시시콜콜한 생각까지 읽어내는 건 어렵다. 그런데 히로카즈는 책에 연출가의 미묘한 감정 변화까지 적어두었다.


읽으며 묵혀 둔 고민들이 풀렸다. 얏빠리... 휩쓸려 가지 말고 나만의 세계관을 구축하자! 이 사람이 좋아졌다. 이런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는 게 미안할 정도. 피 같은 돈 16,200원, 결국 질렀다. YES24 접속–장바구니 담기–주문!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막상 결제 완료 창을 보니 찜찜했다.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불현듯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존재만으로도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는 거라면


나 조정환. 애국심 투철한 편은 아니지만 뿌리는 절대 잊지 않는 남자. 위닝일레븐(축구 게임) 할 때 한 번씩 한국 팀 골라 일본 5대 0으로 이겨야 직성이 풀리고, 매스컴에 등장하는 일본 우익들의 망언에는 ‘저거 저 18노무새키’ 하며 씩씩거린다. 이번 불매운동도 응원 중. ‘NONO재팬’도 들어가 봤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진 않지만... 일단 난 어디 놀러 갈 돈도 없고, 따로 일본 제품을 골라 사지도 않으니 이 정도면 됐지 -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거 일본 책! 아무래도 찜찜했다. 친일파가 된 기분.


하지만 반대로 이런 의문도 든다.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히로카즈를 멀리해야 하는가.

2005년 후지TV 다큐멘터리 <망각>. 과거엔 고이즈미가, 이제는 아베가 헌법 9조를 바꾸고 싶어 한다. (출처: 후지TV, 중앙일보)


그는 <망각>을 만들었다. 2차 대전 가해국으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 ‘헌법 9조’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기획의도라 밝혔다. 헌법 9조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전쟁 포기, 국가 교전권 불인정 등을 규정한 것으로, 일본이 사실상 군대를 가질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조문. 히로카즈는 일본인의 부끄러움을 들춰내며, 이렇게 적었다.


저는 1962년에 태어나 전후 민주주의에 완전히 몸을 담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된다는 분위기가 당연한 듯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나 자위대 문제에 대한 여러 모순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어린 시절 자위대에 품었던 일종의 동경과 현실 사이에는 명백한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p150
독일의 전후 처리 방법은 훌륭했습니다. 자신의 가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공개해 나가는 공정함에 비해 일본은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피해자 의식이 국가적 수준에서도 국민적 수준에서도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제 어머니가 추억으로 이야기하는 전쟁은 도쿄 대공습뿐이었습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타이완과 한국만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지금쯤은...”하고 주눅 들지도 않고 말하는 어머니에게는 명백하게 피해 감정밖에 없습니다. - p161, <망각> - 가해를 망각하기 쉬운 국민성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히로카즈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실까. 멱살을 잡고 왜 일본인이 사죄하지 않는다고 물으실 것인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다큐멘터리 하나 만들었다고 면죄부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와 개인, 역사와 현재의 괴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미묘한 삐걱거림이 나를 찜찜하게 했다.


세상에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일이 너무 많다. (출처:MBC)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비난할 수 있는가. 그의 국적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모든 인간은 그 존재만으로도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인가.


세상은 요지경


불과 5년 전만 해도 나는 선악이 명확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탁한 세상을 내 손으로 바꾸고 싶었다. 비리를 저지르는 정치인, 없는 자들을 더 등쳐먹는 사기꾼, 못된 일본 놈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세상을 더 모르겠다. 절대악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오히려 악이란 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진 세포 같다. 현실에서 착한 놈과 나쁜 놈을 딱 잘라 골라내기 힘들다. 선악은 교묘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욕을 하던 놈들이, 알고 보면 합리적인 경우도 많다. 가끔은 내가 오히려 위선자 같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출처: STONE MUSIC ENT.)


물론 그러던가 말던가, 모든 걸 명확히 나누려는 사람들도 있다. 3주 전 광화문을 지나던 친구가 말했다. 야, 광화문 재밌더라. 양쪽에서 팻말을 들고 있는데 왼쪽에선 ‘NO재팬’. 오른쪽에선 ‘조국 사퇴’, 서로 으르렁대더라고.


김성태 딸 부정채용 뉴스에 달린 베플은 이랬다. ‘조국 사퇴하라는 20대 청년들, 김성태 보고서도 상대적 박탈감 느끼시죠?' '선택적 기회주의자들 ㅉㅉ 친일파 미래가 밝네요.’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집회를 열며 ‘정치색 배제’를 선언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의원 몇 명이 그 자리를 찾았고, 그 탓에 집회는 또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일본 불매운동과 조국 사퇴운동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길래. 한쪽을 선택하면 한쪽을 포기하는 게 당연해져 버린 싸움장. 나는 그 사이에서 어지러움을 느낀다. 입을 떼는 그 순간 한 단어로 규정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나는 그런 사람 아닌데.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이 혼돈의 사회에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봐야 하나. 딱 잘라 정리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히로카즈 덕분에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의 저는 제 생활이 무엇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는지 제대로 그리고 싶습니다. 시대나 사람의 변화를 뒤쫓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사소한 생활에서부터 이야기를 엮어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제 발밑의 사회와 연결된 어두운 부분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외부와 마주하고, 그 좋은 점을 영화 속에서 표현하는 것에 앞으로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 p420


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모두를 설득하고 싶다. 잘못은 반드시 짚고 각자의 입장은 인정할 수 있는.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와, 정말 뜬구름 잡는 소리구나. 어쨌든 진심이다. 이러쿵저러쿵 말고 영상으로 보여줘야겠지.


근데 일단 PD가 되어야 한다.




SBS 교양 PD가 될 뻔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떨어졌다. only one이 되지 못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난 왜 선택받지 못했나. 초조하지도 자만하지도 않았다. 내 퍼포먼스가 형편없던 걸까. 내가 매력이 그리 없나. 그런 것도 아니라면 뭔가 오해받은 건 아닐까. 종종 그런 적이 있어서리... 그래도 날 알면 싫어할 수 없을텐데~ 별 생각을 다 해본다. 이유를 모르니까 괴롭다. 물어보고 싶다. 허나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다. 어쩔 수 없네. 결과는 나왔고 얼른 털어버리는 게 좋다. 다음 대회를 준비하는 프로처럼.


여하튼, 알 수 없다. 세상은커녕 내 앞길도...


하지만 분명, SBS. 나를 안 뽑은 걸 후회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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