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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환Juancho Jan 07. 2019

당신이 몰랐던 EBS 이야기

공영방송이 꿈꾸는 봉합 사회


이번엔 EBS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매번 마주쳤던 방학 숙제 말고, 수능 인터넷 강의도 아닌, 당신이 몰랐던 EBS 이야기를. 이 글을 읽고 당신이 EBS를 다시 봤으면 좋겠다.




파편사회 대한민국


한국일보는 새해 첫날 기사에서 ‘대한민국은 파편사회’란 말을 썼다. 참 좋은 비유다.


출처: 네이버 사전


이제 대한민국은 하나의 덩어리로 설명하기 어렵다. 깨져서 파편이 됐다. 좌파와 우파, 촛불과 태극기, 꼰대와 요즘 것들, 남과 여, 파견직과 정규직. 그거 말고도 수만 가지 집단으로 잘게, 아주 잘게. 한번 깨진 조각은 이어지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주로 부딪힌다. 아예 무관심하거나.


이제껏 잘 뭉쳐 있었는데 왜 그러냐,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겠다. 억지로 붙어있었을 뿐이야. 예전엔 ‘애국심’이나 ‘성장’ 같은 접착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갔는지를. 파편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셈법은 명확하다. ‘나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가’가 판단 기준이다. 올림픽의 열기는 왜 예전 같지 않은가, ‘국민 영웅’의 올림픽 메달이 내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 영웅이란 말도 이제는 어색하다.


혐오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안위를 방해하는, 혹은 방해할 여지가 있어 보이는 대상이 쉽게 타깃이 되는 것이다. 욕하고 헐뜯고 깎아내린다. 한 연예인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욕을 먹었고,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방영 전부터 평점 테러를 당했다. 설령 상대편이 맞는 말을 해도 일단 때린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이성적 판단보다는 진영 논리가 앞선다.


EBS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파편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솔직한 심정은 이렇다.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 들이밀고 싶다. ‘이렇게 다들 싸우고 있지만 서로 뭉쳐서 노력하면 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서로 이해도 하고 용서도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쉽지 않은 게 오해를 받는다. 어렵다. 피디가 되면 내 프로그램을 많은 사람들이 볼 텐데, 그때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나. 아, 머리 아프다.


출처: MBC


그래도 마냥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닌 게, 알고 보니 나의 롤 모델이 많았다. 대부분 EBS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공동체를 다시 만들어 봅시다! 혐오 말고 사랑을 합시다!’ 열심히 외치고 있다. 서로 다른 파편이 부딪혀도 잘 살 수 있는 모습(나는 이를 봉합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을 보여준다. 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진다. 나도 저런 거 만들고 싶다, EBS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몇 개를 소개한다. 유익한데, 심지어 재미(!!!) 있다.


당신이 기대하던 낯선 만남처럼, <조식포함 아파트>


- 셰프, 연예인으로 이뤄진 ‘밥차 군단’이 아파트에 출동해 조식 뷔페를 차려 데면데면한 이웃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공동체의 정을 느껴보는 프로그램


출처: EBS


조식포함 호텔처럼, 아파트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다는 게 <조식포함 아파트>의 콘셉트이다. 출연진이 각 세대를 방문해 음식 재료를 모으고, 주민들은 제작진이 설치한 공동 냉장고에 재료를 넣는다. 식재료 혹은 가족 이야기가 이어진다. 뷔페 운영 시간은 아침 6-9시, 박명수와 알베르토 몬디가 주민을 맞이한다. 물론 공짜다. 그 대신 주민들은 이웃과 대화를 하거나, 이벤트에 참여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담긴다.


우리는 여행에서의 낯선 만남을 꿈꾸지만, 정작 가까이에 사는 타인을 경계한다. 층간소음, 주차문제, 성범죄... 언제든 나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으니까. 불안해하며 산다. <조식포함 아파트>는 말한다. 함께 사는 게 훨씬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보다 보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 위에 박명수의 개그가 얹힌다.


출처: EBS


PD 지망생 입장에서도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내가 보기엔 ‘먹히는’ 기획안이다. 저런 걸 써야 하는데! 기획의도, 콘셉트, 포맷과 출연진의 조화가 훌륭하다. 셰프 분들이 정말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TMI인데 나는 군대에서 취사병이었다. 매일 400여 명의 간부를 상대해야 했는데 끔찍한 기억이다. 아무튼 그런 게 먼저 보인다.

 

소외된 부모들 왼발을 한 보 앞으로, <엄마를 찾지마>와 <부모 성적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본인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기성세대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노인들을 ‘꼰대’, ‘틀딱’ 정도로 치부하면서 말이다. 가족의 경우라도 그렇다. ‘등골 브레이커’가 아니어도, 자식은 보통 부모를 잘 믿지 않는다. 보수적이고 딱딱할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엄마를 찾지마>와 <부모 성적표>는 그런 젊은이들을 향한 프로그램이다.


<엄마를 찾지마> (출처: EBS)


유급 가출 프로젝트 <엄마를 찾지마>. 제작진은 엄마에게 100만 원과 함께 사라질 기회를 준다. 자유의 몸이 된 엄마가 일탈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가족들은 흔적을 따라 엄마를 추적해야 한다. 남편과 자식이 쩔쩔매는 모습이 이 프로그램의 포인트. 재미있는 그림이 많이 나올 것 같은 포맷인데, 의외로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엄마가 제대로 된 일탈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ㅠㅠ


<부모 성적표>. 부모와 자녀의 거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컨셉. (출처: EBS)


우리 가족 거리 좁히기 <부모성적표>. 본격 다구리(...) 방송이다. KBS <안녕하세요>처럼, 고민이 있는 자녀가 하소연하러 나온다. 동시에 청소년 100명이 모인 스튜디오에 사연의 부모를 앉힌다. 가족 관찰카메라를 보면서 100명이 실시간으로 부모를 평가한다. 엄청 적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VCR이 끝나면 둘은 울고 있다. 몰랐던 가족의 일상을 알게 된 것이다. 의외로 철없는 부모의 모습도 나온다. 일반인 가족 관찰 예능이다.


요즘 것들이 말이야... 멋있어 <배워서 남줄랩>


반대 이야기도 들어보자. 기성세대는 청년을 예단한다. 지식만 있고 지혜가 없다,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른다며 깎아내린다. 그 어른들이 <배워서 남줄랩>을 보면 놀랄 것이다. 힙합x지식 컬래버레이션 강연쇼. 강연과 공연이 핵심 포맷이다.


겉모습만 보고 절대 판단하지 마 추성훈도 가정으로 돌아가 둘러 앞치마! (출처: EBS)


'1말2초' 래퍼들이 명사의 강연을 듣는다. 지식 전달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질문과 답변이 여러 번 오간다. 꽤 날카롭다. 래퍼들은 어느 면에서는 가치관이 확고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청소년일 뿐이다. 강연을 하면서 지혜를 쌓아간다. 그리고 가사를 쓴다. 랩으로 만들어서, 공연. 어른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면 느낄 거다. 요즘 애들, 멋있는데? 뭐 뻔하지 하며 채널을 돌려버린다면 유감이다.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당신이다.

 

당신이 눈치 못 챘겠지만


EBS는 노력하고 있다. TV에 관심 없는 분들께 소개하고 싶었다. 열심히 쓰고 나니 또 속이 쓰리네...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 좀처럼 회자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나도 반년 전 스터디에서 모니터링 안 했으면 몰랐을 거다. 팬의 입장에서 너무너무 안타깝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프로그램이 의미가 있을까.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하나의 몸짓...


어떻게 보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얘기를 하기 전에, 그 몫이 온전히 제작PD에게 있는 걸까,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 프로그램들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도 있다. 높은 시청률보다 그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게 공영방송의 역할이기도 할 테고. 아무쪼록 이런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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