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한참 어렸을 때. 그때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정말 신기한 일을 그들에게 말해주면, '아, 그러냐.'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하며 타박하거나. 어른이란 종족은 세상만사가 익숙해져서 웬만한 일로는 놀랍지도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건 재미없다. 얼음땡과 탈출도 안 하는 세상. 별다른 자극도 없고 다 예측 가능한 일상이라면 뭐가 재밌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익숙하면 곤란하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 건 누구도 피할 수 없기에, 어린이 조정환은 아쉬운 대로 결심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 고통을 극복하자. 그중 하나가 되도록이면 낯선 경험 택하기. 어떤 선택을 앞두고 고민할 때 웬만하면 가장 새로운 선택지를 골랐다. 입시를 독학으로 준비한다거나, 교환학생 국가로 굳이 가볼 일 없는 멕시코를 간다거나...
그러니까 지금도 난 첫 수업을 준비하고 있지! 후후
그러니까 지금!
지금?!
?!
나도 모르게 멍 때리고 있었다. 여긴 어디? 강의실.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한다. 9시 57분. 수업 시간 3분 전이다. 앗, 앞에는 20여 명이 앉아있다. 다 처음 보는 사람들. 무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 맞다. 수업해야지.
이런 낯섦.
재밌겠다.
끼요옷~
4화 BGM) 바스코 – 첫느낌 https://www.youtube.com/watch?v=KWe1FTJe-08
“음... 책 안 펼치셔도 돼요, 오늘. 오늘은 공부 안 할 거거든요.”
정말 이렇게 말했다. 묘한 침묵, 다들 나만 쳐다본다.
여여~ 집중 성공.
“안녕하세요, 저는 조정환이라고 하는 사람이고요. 아시다시피 사회 과목이에요.” 그렇게 시작했다. 어젯밤에 잔뜩 준비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존댓말로.
여러분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전혀 모른다. 이 시설(남동구청소년센터)에 방문한 게 이번이 두 번째다. 여러분보다 내가 더 여기에 대해 모른다. 그러니까 수업을 무작정 진행할 수 없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니까. 억지로 공부해야 하는 데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는 같은 20대다. (흐뭇) 일단 나는 좀 알아야겠다,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여기 있는 사람이 왜 여기 모였고,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렀을 때, 학생들은 당황하는 듯 보였다. ‘딴 과목 가르치는 선생들이랑 완전 다른 놈인데 이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얘기로 수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없었나?
여여~ 밑밥 깔기 성공.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 투척.
“그러니까, 지금부터 자기소개할 거예요.”
잠깐잠깐~ 야레야레~ 그냥 자기소개가 아니다. 매번 하는 이름, 나이, 취미 이런 거는 금지다. 듣고 싶은 거는 딱 두 가지다. 여기 온 이유. 그리고 학교 밖으로 나왔으면서 굳이 검정고시를 준비하려는 이유. 두 개 얘기하기. 방식은 간단하다. 한 명씩 나와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 끝나면 자기 이름을 칠판에 쓴다. 그리고 다음 사람을 지목. 바통 터치.
첫 타자는 나다. 누가 스타트를 끊어줘야 시작할 게 분명하니까.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진심을 꺼내 놓지 않을 것이니까.
여기 온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에요. 돈이 필요했고, 찾다가 여기 공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어, 참고로 얼마인지 말해줄 순 없어요. 저는 상관없지만 다른 모든 선생님들이 곤란할 수가 있으니까~ 돈이 왜 필요하냐면요, 꿈이 있는데... 피디가 되는 것이에요. 그니까 다른 거 말고 방송국 피디
1화, Life is strange – https://brunch.co.kr/@juancho/19 스토리를 압축해서 얘기했다. 거짓도 보탬도 없이. 10분이 넘어가자 자기소개는 어느새 신세한탄이 돼버렸다. 이런 얘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별 TMI까지 다 말했다. 그렇지만, 성공했다. 왜냐면 다음 차례부터 학생들이 진심으로 자기소개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설계한 걸 이 친구들도 재밌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앉아있다는 걸 알게 됐다. 미용에 꿈이 있는 친구(경험을 위해 자퇴했다), 운동을 하다 그만두게 되어 여기까지 온 친구, 유학 중 한국에 돌아오게 돼 어쩔 수 없이 검정고시를 보게 된 친구, 집은 부유한데 하고 싶은 건 없어서 비행, 결국 아버지가 시켜서 검정고시를 보러 왔다는 친구까지. 목표도 제각각이었다. 100점도 있고 통과만 해도 되고. 저마다의 사정을 내키는 만큼 이야기했다. 앉아만 있으면 알기 힘든 타인에 대한 얘기들. 사실 강의실에 모인 20여 명은 대부분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본인 얘기를 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고마웠다. 첫 수업이니까 가능했던 것 같다. 나만큼 학생들도 들떠 있었던 건 아닐까. 한 바퀴를 도니 끝날 시각이 되어 있었다.
집에 가려고 하는데 아까 함께 한 학생들을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나를 보고 인사한다. 나도 넵 안녕하세요~라고 대꾸. “오 쌤~ 아직 안 가셨네요.” 벌써부터 나를 살갑게 대하는 친구도 있었다. 18살 때 나의 모습처럼, 까불이 인상. 사실 나는 이런 살가움이 몹시 어색했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다. 이런 친한 척이 얼마만이더라... 내친김에 물었다. 오늘 제 수업 스타일 어땠어요? 재밌었다고 했다. 다른 과목보다 이게 더 좋다고 했다.
기분이 으쓱했다.
역시 하길 잘했어.
이런 낯섦.
재밌겠다.
끼요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