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걷기에도 적응이 필요하다. 길 적응.
마냥 걸으면 될 것 같지만 이정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헤매기 쉽다. 핸드폰으로 길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영 번거롭다. 5분에 한번씩 멈춰 네이버 지도를 확인하기엔 조금... 애초에 앞을 보고 걸으려고 시작한 사람들이다. 고개 숙이고 다니는 것에 질렸기에, 폰을 볼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꼬불꼬불한 그 길을 어떻게?
리본을 확인하며 간다.
파란색은 정방향(1 → 21), 주황색은 역방향(21 → 1) 표시다
리본은 올레길 옆 구조물에서, 느낌상 대략 30~50m 정도 간격으로 볼 수 있다. 감귤나무 가지에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거나, 전봇대/담벼락에 화살표와 함께 붙어 있는 식이다. ‘올레길 유니버스’의 공용어(語)이자 가이드라인인 셈. 코스의 시작부터 끝까지 꼼꼼히 있어서, 여행자는 이걸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올레길을 처음 걸으면 크게 3단계 적응기를 거친다.
1단계. 리본이 안 보이면 불안한 단계
초행자는 모든 게 새롭다. 모든 게 경계 대상이다.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하고.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말 ‘리본만 보고’ 가는 단계. 물론 정반대 경우도 있다. 사진도 찍고 경치에 감탄하다가 길을 잃는 상황. 한참 즐기다가 주위를 본다. 없다. 리본 실종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지도 어플을 확인하면 코스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본인을 발견, 가장 마지막에 봤던 리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마음이 아직 편하지 않은 상태.
2단계, 다음 리본이 어딘지 맞출 수 있는 단계
이제 대강의 길이 보인다. 이 정도 속도로 걸으면 점심은 이쯤에서 먹겠구나, 근처 음식점도 한번 검색해보고... 다음날 묵을 게스트하우스도 전날 밤 예약 완료. 슬슬 제주도 풍경 패턴이 익숙해지는 단계. 갈림길을 만나면 다음 리본이 왼쪽에 있을지 오른쪽에 있을지 맞춰본다. 이번엔 오른쪽이디... 좀 걸으면 리본을 발견! 묘한 쾌감도 있다. 어떻게 맞추냐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확실히’ 안다. ‘올레길스러운’ 길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길을 잃어도 문제없다. 다시 ‘올레길스러운’ 길로 찾아가면 된다. 핸드폰 없이도 가능하다.
3단계, 로드 마스터
이제는 리본의 유무와 상관없이 걷는 단계. 이때쯤 되면 길을 각자 본인 버전으로 커스터마이징 한다. 리본이 오른쪽에 있더라도 왼쪽 길로 걸어본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저 앞에서 다시 합쳐지면 되니까.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을 즐기는 것이다. 정해 놓은 코스가 큰 의미가 없어진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다. 얽매이지 않고 올레길을 즐기게 된 것이다.
올레길 걷기는 인생과 비슷하다.
살면서 많은 리본을 만났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 인생 최초의 리본은 교과서였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과 주변 어른의 말씀들. 공부 열심히 하고 말 잘 들어라... 스무 살이 한참 넘은 지금도 수많은 리본을 마주친다. 여러 조언이나 자기 계발서나 강연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올레길에서나 인생에서나 리본은 그저 리본이다.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가이드라인은 가이드라인일 뿐. 걷는 것은 나고.
인생을 처음 사는 내게도 3단계 적응 과정이 있다면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아직 3단계 ‘인생 마스터’가 되려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