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일종의 고백

물집이 딱지가 되고 찢어질 때까지

by 조정환Juancho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기노’라는 남자가 나온다. 그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날, 이제껏 나름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던 회사를 그만둔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일부러 그랬다기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것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딴 술집을 개업한다. 시간이 지나고 단골이 생길 정도로 술집은 평온함을 유지한다.


그러다 술집에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담뱃불에 의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흉터를 짚어보게 된다거나, 마스코트였던 길고양이가 크게 가르랑대는 소리를 내더니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갑자기 술집 근처에 뱀들이 모이기 시작한다거나. 결국 의문의 손님이 찾아와서 당신은 먼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별 다른 설명도 없이,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멀리 가야한다면서.


하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듯 온 호텔방에서 그는 노크 소리를 듣는다. 똑똑. 문을 열지 않지만 노크 소리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바로 귓가에서 울린다. 똑똑. 똑똑.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기노는 눈을 꼭 감은 채 그 살갗의 온기를 생각하고 부드럽고 도도록한 살집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에게서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래. 나는 상처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기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어둡고 조용한 방 안에서.


발바닥의 물집을 보며 난 기노를 떠올렸다.


셋째 날 오후, 게스트하우스 도착하려면 3km 남았는데 발이 너무 따가웠다. 양말을 벗고 발바닥을 들여다봤더니

정가운데에 물집이 생겼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피부가 약간 밀려들어가면서 뽀득거린다. 쓰렸다.


다음 날 걸어야 하는데 물집이 영 걸리적거렸다. 하지만 그냥 걸었다. 발바닥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기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울퉁불퉁한 현무암 위로 왼발 오른발. 물렁했던 물집은 딱딱해졌고, 이제 가만히 있을 때에도 얼얼함이 발 전체를 감쌌다. 그래도 그냥 걸었다. 그렇게 15km를 더 걸어 70km를 채웠다.


돌아가는 비행기에 타기 전 확인해 보니 물집은 다 찢어져 있었다. 발날로만 디뎌 뒤뚱거리는 나의 걸음.


사실 쉬어야 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비행기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 다행이었다. 아마 2주가 있었더라도 이렇게 내리 걷는다면 곧 탈이 났을 거다. 건강하고 체력도 좋다고 자신만만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발의 내구도는 이 정도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계속 걷지 못하게 된다. 상처는 아주 서서히 아문다.


그렇다. 나는 쉬어야 했다. 나는 최종에서 떨어진 그 날에도, 4번 연속 떨어진 그 날에도 동네 풋살장에서 이어폰을 끼고 조깅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방에 들어와 넷플릭스를 켰다. 웃지도 울지도 않고 담담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아픔도 물집처럼 서서히 아문다. 신경 써주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지난 몇 달 스스로를 너무 조급하게 밀어붙였다. 물집이 딱지가 되어 찢어질 때까지. 언제나 목표가 뚜렷하고 에너지는 넘치며 멘탈 강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고 나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른 채. 아픔을 인정했어야 했다. 쉬어야 했다.


그래, 나는 상처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사흘간 걸은 길을 그대로 되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고작 그 물집 하나 때문에 별 생각을 다 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마치 기노가 된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