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젠가 시뮬레이션 다큐를 만들고 싶다. ‘시뮬레이션 다큐’라는 말은 내가 그냥 만든 단어인데, 규범이 있는 가상 세계에 출연자를 투입한 다음, 공동 목표와 개별 미션을 부여하고 각자의 행동을 담는 장르다. 예로tvN <소사이어티 게임>이라든지 SBS <인생게임 상속자>를 떠올리면 쉽다.
그런데, 이런 걸 만들려면 물리적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먼저 거대 세트장(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세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시간 충분한 출연자(가상 세계에서 생활해야 하니까)와 이들을 찍는 카메라, 또 시뮬레이션 세계를 구성할 각종 소품&아이디어...
<머니게임>이나 <가짜 사나이>같이 스케일 큰 웹 예능도 나오고 있지만... (출처: Wavve, Tving)
물리적 인프라만 있으면 가능할까? 그럴 리가. 더 중요한 게 노하우다. 기획력은 물론이고 출연자 및 스태프를 아우르는 리더십, 현장에서의 결단력과 유연함, 편집 센스까지... 이런 능력은돈과 아이디어가 있다고 뚝딱 길러지지 않는다. 지난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그래야 시나브로 쌓인다.
하지만대부분의 뉴미디어 회사엔 둘 다 없다. 프로그램 스케일에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뮬레이션 다큐를 제대로 해보려면, 난 당연히 방송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성장하고 싶었다. 자기소개서에 주로 썼던 내용이기도 하다.
2. 급여 조건이 훨씬 좋다
프리랜서와 계약직을 전전하며 깨달았다. PD도 하나의 직업일 뿐이라는 걸. 자아실현이고 뭐고 그전에한 명의 회사원이고 월급 받는 직장인이다. 월급이 주는 감흥은상상 이상으로 크다(그걸 이제야 알다니!). 그런데 99.9프로의 뉴미디어 회사는 박봉이다.
응? 디지털 콘텐츠 시장 커졌고 계속 커지고 있다며, 광고 단가도 TV보다 세고! 거짓말이었어? 음... 다 맞는 말인데... 이쯤에서 이런 얘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
디지털 콘텐츠 시장의 파이가 커졌다고 노동자 개인의 몫도 커진 걸까?
정말 놀랍게도, 둘의 상관관계는 거의 없다. 디지털 콘텐츠 시장은 커지고, 뉴미디어 기업들은 성장하고 있지만, PD의 노동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급여 수준부터 고용 형태, 복리후생 뭐 하나 예외 없이. 아 물론 성공한 소수는 다르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 소수도 대부분 방송국 출신 경력직이다. 거액에 스카우트되거나 각종 규제에 답답함을 느끼고 나온 것이다.
물론 내가 모르는 이면이 있겠지.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계약직으로 근무할 때, 이름깨나 알려진 유투브 채널에 영상을 올리며 난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콘텐츠의 흥행이 직접적으로 내 가치를 높여주는 건 아니구나. 게다가 주니어 급에 불과한 내가 이 시장에서 아무리 능력을 발휘해봐야,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어쩌면 인정받는 거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고... 그래서 방송국에 꼭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인데, 아무래도 자소서엔 쓰지 못했다.
여기까지가 나의 방송국 PD 지원동기다.
당연하게도,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한 사람의 의견으로 읽어주시길. 남몰래 ‘지원동기’ 네 글자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께 이 글이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흔히 방송국을 '침몰하는 배'에 비유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이 배에 나는 탑승했고... 이제 해야 할 일은 열심히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거다. 다양한 영법을아주 감각적으로. 배가 다 가라앉고 망망대해에 놓이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음... 그런 의미로
브런치북의 제목은 '가라앉는 방송국에서 헤엄치는 남자이야기' 뭐 이런 식이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