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정환Juancho May 08. 2021

윤석열 아저씨

공채 PD 합격 소회와 그간의 사정

아니, 그게 가능하다고?

 

윤석열 아저씨는 사법고시에 8번 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9수째에 검사가 되었고. 진짜 미친 사람이구나,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그때가 PD 공채 최종 단계에서만 3번 떨어진 다음이었다.

 

9년.

윤석열 아저씨는 9년을 버텼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며.

 

그가 겪었을 고뇌를 상상해보았다. 어떤 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매일 아침 책을 펼칠 때마다 엄습했을 막막함과, 출발점에도 못 서는 본인을 밟을 때마다 느꼈을 절망감. 그 크기는 얼만큼이었을지.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꿈쩍 않고 초연한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어느 순간 세상일에 달관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웃기지만 묘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물론 내 쪽에서의 일방적 감정이었다. 딱히 우리 사이의 공통점은 없었고, 나는 하루하루 버티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기에, 신세 투영할 누군가로 아저씨를 골랐던 것뿐이다. 그래, 나도 저 사람처럼…

 

허나 그러고도 1년이 넘도록 나는 실패했다.


그 사이 최종 면접 탈락이 2번, 실무 면접 락이 3번, 서류 및 필기 탈락은 그 이상. PD 공채에 지원한 기록을 모두 세어보니, 통산 전적 0승 49패 (그중 최종 전형 탈락 5회). 변명할 여지도 없이, 명실상부한 ‘언시 장수생’이 된 것이다.


그때의 나? 그때 나는


내 신세가 마치 승부차기를 치르고 있는 축구팀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주어진 5번의 슛 기회를 모두 날린 다음 상대 결과만 기다리는 상황의 팀.


골키퍼가 아무리 잘 막아도, 팀이 승리할 순 없다.

골이 없기 때문이다. 잘해봐야 결과는 0대 0이니까, 비기기 이상은 못한다.


어쩌면 나는 이미 '최종 면접'이라는 5번의 결정적 골 기회를 다 날리고, 근성이란 이름의 골키퍼를 세워둔 채로,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슛 기회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괴로웠다. 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승부차기 다섯 번의 기회만큼, 최종에 5번 올라가 보고도 고작 1골을 못 넣었으니 이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셈 아닌가. 그게 운이든, 능력이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난 더 이상 PD 공채에 지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2021년 1월부턴 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원했다.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다 한 곳에 합격했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게 2021년 2~3월. 봄내음이 비렸다.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으로 지원했던 50번째 PD 공채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코로나다 뭐다 해서 채용 일정이 미뤄진 곳이었다. 어라? 이거 6번째 키커에게도 기회가 온 건가. 필기시험과 2번의 면접을 치렀다. 그리고도 한참 후,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최종 스코어 1승 49패, 여기까지가 내가 방송국 PD가 된 이야기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 나는 이미 PD라고 불리긴 했다. '프리랜서', '편집자' 혹은 '계약직 유투브 PD' 같은 이름들로. 하지만 그건 서류 상에서의 명칭이라든지 대외적 차원의 호칭일 뿐,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6번째 킥을 차려던 건 아니다. 이미 난 지쳤고, 엄두도 안 났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종편 방송사의 PD로 입사하게 된 것이다. 취준생-백수-프리랜서 PD-유투브 편집자-계약직 PD를 거쳐서 드디어. 아, 음... 그 기분은...


존나 기쁘다.


이렇게 되고 나니 윤석열 아저씨가 떠올랐다.

나는 9수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그가 고시 합격 결과를 받고 어떤 느낌이었을지 아주 조금은 짐작이 간다.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꿈쩍 않는 모습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물론 내 쪽에서의 일방적 감정이다. 딱히 우리 사이의 공통점은 없으니... 어쨌든 아주 다행히도, 나는 방송국 제작PD가 되었다.


하고 싶은 것도 기대되는 것도 많다. '어떤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까', '누구와 함께 일하게 될까' 같은 PD로서의 기대부터, 내가 가장 사랑하는 현주와 어떻게 미래를 꾸릴지 하는 뭐 이런 개인적인 계획까지. 3년 넘게 출발점 근처에서 서성이기만 했다. 이제 출발했으니 할 게 많다.


하고 싶던 방송 제작 일이 내 일이 되었으니, 정말 잘하고 싶다. 그래서 글을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기본적으로는 나를 위해서다. 내 생각을 브런치에 적으며 방법을 찾을 거니까. 또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 누군가를 향해서이기도 하다. 그 또한 어쨌든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방송국 공채에 매달렸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