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난 드라마를 잘 안 보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단 그냥 그런 성향이다. 긴 호흡의 전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가 감정 표현에 있어서 섬세한 편도 아니다. 오히려 확실히 건조하다. 그래서 소설을 고를 때도 단편을 훨씬 많이 집어든다. 행동과 사건이 명확하고 빠르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미묘한 감정선'이 크게 작용하는 이 장르에 잘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부라니.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올 게 왔구나, 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나는 알게 모르게 콘텐츠 편식을 하고 있다(고 꽤 오래 생각해왔다). PD 한다는 놈이 보고 싶은 것만 봐서야 되겠는가. 이제 나는 시청자가 아니라 제작자가 되어야 한다. 유투브 추천 영상만 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찾다 보면 시나브로 편협한 시선을 갖게 될 거다. 그건 내가 제일 되기 싫어하는 모습인데…드라마부 배치는 그런 점에서 정말 좋은 기회였다. 평소라면 전혀 안 해볼 선택들을 일로써 하게 되는 것이니까, 내 그릇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겠구나, 이참에 습관도 바꿔보리라 다짐했다.
첫 출근날, 가장 처음 맡은 일은 '모니터링'이었다.
마침 우리 회사는 새로운 드라마 론칭을 준비하고 있었다. '종편 10주년' 기획물이었고 20부작에 사극이었다. 우선 나는 이 작품에 대해 파악해야 했다.
- 4회까지의 마스터본(그대로 방송에 내보낼 수 있는 버전)
- 10화까지의 클린본(편집은 되었지만 색보정, 음향 등 후작업이 안 된 버전)
- 20화(완결)까지의 대본
차장님(이자 프로듀서)은 내게 이만큼의 자료를 던져주셨다. 다 보고 작품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하셨다. 감상은 어떤지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덧붙여 첫방 시청률을 예측해보라고 하셨다. 내기하는 거라며, 꼴찌가 밥을 사야 한다고 하셨다. 농담 반 진담 반 말씀이었지만, 나는 그걸 막중한 임무로 받아들였다. 본격 공부의 시작! 주어진 자료는 물론이고, 동시간대 프로그램도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빈센조>의 인기비결은 뭘까, 음 <모범택시>는 이런 패턴이구나, 나름대로 정리해가면서. 몰랐던 매력 포인트가 많았다. 각 장르와 작품마다, 콘셉트도 시청 타깃도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드라마는 확실히 재밌었다.
울 드라마의 편성은 토/일 저녁 9시 40분. 동시간대 프로그램들, 정말 후덜덜하다.
하루는 부장님(이자 책임 프로듀서)과 여의도로 갔다. 5,6회 시사하러 종합편집실에 간다고 하셨다(참고로 이 때는 첫 방송 전이었다). 시사는 '영화나광고따위를일반에게공개하기전에심사원, 비평가, 제작관계자등의특정인에게시험적으로보이는일'을 의미한다. 제작사 스태프 분들을 만나러 가시는데 나를 데려가 주신 것이다.
이미 스태프 대여섯 분이 계셨다. 나로서는 모든 게 첫 경험이었기 때문에, 어리바리해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조심히 행동했다. 그래도 아마 티가 많이 났을 것이다. 제작사 이사님의 명함을 받고(내가 신입임에도 고개 숙여 인사해주셨다. 나 또한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드렸다.)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별 건 없었다. 함께 작업물을 보다가, 수정할 부분을 부장님이 짚으면, 음향 감독님/편집자님이 반영하는 식이었다. 바로 처리할 수 없는 경우 '여긴 A 배우랑 스케줄을 잡고 후시녹음해서 덧붙입시다' 하고 남겨두기도 했다. 의견 대립이나 말다툼이 있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긴장감도 느껴졌다.
그런데 여기서 이벤트가 하나 있었다. 6화까지 시사가 모두 끝난 후, 부장님께서 편집자님에게 무슨무슨 얘기를 하시더니, 타닥타닥 소리가 났고, 스탭 롤 쪽에 뭔가 자막이 덧붙여졌다. 아마도 내 이름이 추가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헉
정일우, 권유리님이 있는 장면에 내 이름이 실리기도 하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하자면, 민망했다.
한참 동안 '내가 과연 이 롤에 실릴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제작진의 일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난 드라마부 소속이고 미약하게나마 한 일도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뭘 기여했냐'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딱히 자신없다. 내 기준에서는 쑥스러움을 넘어서 약간의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마치 롯데월드에서 아틀란티스를 타려면 1시간 줄을 서야 하는데, 친구가 타기 직전 날름 붙어 대기 없이 놀이기구를 탄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부장님께선 신입인 나를 챙겨주시려고 그런 것 같다. 물론 알고 있다. 감사했다. 거기에 내가 기겁하며 '저는 괜찮습니다, 빼 주십시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리저리 고민하다 부장님께 조심히 말씀드렸다. "데리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장님이 약간 웃으면서 말씀하셨는데, 뭐라셨더라…
3주 후 내 이름은 티비에 실렸다. 차마 주변에 알리진 못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내가 그런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주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축하해주셨다. 그러면 '아하 ㅎㅎ 네' 하고 마음껏 쑥스러워했다. 회사에서는 새롭게 들어온 대본을 읽고, 공부할 드라마를 계속 찾아보고, 론칭한 타사 프로그램을 체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