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선배가 상암의 한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했다. 그곳은 회사도 촬영장도 아니었다. 종편 스튜디오라는 곳이었다. 그렇게 난 처음으로 종편실에 가보게 되었다.
종편은 '종합편집'의 줄임말인데, 프로그램 제작의 후반부 작업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예를 들어, <라디오스타>에서 출연진 위에 입혀지는 CG 그래픽을 만드는 일이나 <하트시그널>에서 분위기에 맞는 BGM을 까는 일들.
클린본과 마스터본의 차이
요리로 따지면 간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PD가 작업한 클린본(컷 편집이 완료된 촬영 데이터)이 더 맛깔나도록 혹은 허전해 보이지 않도록 오디오+비디오를 추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방송국에 들어온 후, 종편에 직접 참여한 건 처음이었다.
사무실의 첫인상은 '와 생각보다 훨씬 크네'
편집실이라고 쓰인 방이 10개는 훌쩍 넘고, 컴퓨터는 수십 대에, 직원분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솔직히 약간 놀랐다. 이런 시스템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자막 넣고, 배경음악 깔고, 애펙 켜서 모션그래픽 좀 만지고... 사실 이런 건 쭉 그냥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프리랜서일 때는 'No copyright BGM', '무료 효과음', '무료 폰트'를 찾아 헤맸고, 회사에서 유투브 콘텐츠 만들 땐 끽해야 디자이너 분에게 일러스트 파일 받아 조금 수정해서 만드는 식으로 해왔으니(집이나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뚱땅거린다), 이렇게 인프라를 갖춘- 비디오+오디오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다.
이날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자막 넣기'
물론 프리랜서 시절 수백 번은 더 해봤던 일이다. 내용에 맞는 내용을 고민하고, 적당히 센스 있게 넣기.
하지만 여기서는 정말 달랐다. 이미 모든 게 만들어져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작업할 컴퓨터엔 자막 파일이 깔려 있었고(작가진이 적은 텍스트를 가지고 종편실에서 만들어 준 일러스트 파일), 난 프로그램을 켜고 쉼표 키(삽입 단축기)만 누르면 됐다. 나는 In점과 Out점만 타이밍에 맞춰서 확인하면 끝인 상황.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나는 '쉼표(삽입)'와 'Delete(삭제)', '스페이스 바(재생)'를 반복해서 눌렀다. 마치 기계처럼. 그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자막 클리어.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있었다.
대부분 지켜보는 일이었다. 가끔 원하는 방향을 설명하면서, 이 작업이 잘 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게 전부였기에. 종편감독님이 그래픽 작업하는 모습, 성우님께서 더빙하는 장면, 음향감독님이 믹싱하는 모습도... 함께했다. 참여한다기보단 뒤에서 바라보는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PD가 '실제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날은 그렇게 느꼈다.)
50분짜리 아침 정보 프로그램인데 종편하는 데 하루 종일 걸렸다.결국 새벽에 퇴근.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첫 번째, 아~ TV 프로그램 제작 과정은 정말 번거롭다.
정말 모든 프로그램에 굳이 이런 종편과정이 필요한가? 실제 시청자가 그 정도의 수고를 원하는가? 인지하는가? 알아주는가? 냉철하게 봤을 때 이런 후반부 작업이 그만큼 중요한가? 대폭 간소화해도 되는 거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샘솟았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런 과정을 처음 겪은 나로서는.
다음은 두 번째, 아- 이런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 게 프로그램 제작 씬의 질서구나.
프리랜서&계약직으로 일하며 이제껏 내가 우당탕탕 어설프게 처리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다 세세하고 전문적으로 나뉘어 누군가의 밥벌이가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유투브 PD일 때는 내가 모든 걸 다 했는데 여기선 아니다. PD의 역할은 직접 하는 것이 아닌 모든 걸 조율하는 것에 가깝다. 종편이든 뭐든, 그게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 생태계에서는 어쨌든 이런 주변인(?) 과정을 무조건 지나야 한다는 걸, 실감했다.
마지막, 그렇기에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
PD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별로 없다. 프로그램 제작은 팀 단위로 이뤄진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다 한들 함께할 동료가 없으면 무형일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아이디어를 각 스태프에게 얼마나 잘 전달하고 함께 실행하느냐다. 그러니까 정말 PD에게 필요한 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던지 신뢰할만한 모습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그 자체로도 엄청난 능력이다.
당연하게도 다짐했다.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을 항상 봐야겠군.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면,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