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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환Juancho Oct 02. 2021

PD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 과정

하루는 선배가 상암의 한 사무실로 출근하라고 했다. 그곳은 회사도 촬영장도 아니었다. 종편 스튜디오라는 곳이었다. 그렇게 난 처음으로 종편실에 가보게 되었다.


종편은 '종합편집'의 줄임말인데, 프로그램 제작의 후반부 작업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예를 들어, <라디오스타>에서 출연진 위에 입혀지는 CG 그래픽을 만드는 일이나 <하트시그널>에서 분위기에 맞는 BGM을 까는 일들.


클린본과 마스터본의 차이


요리로 따지면 간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PD가 작업한 클린본(컷 편집이 완료된 촬영 데이터)이 더 맛깔나도록 혹은 허전해 보이지 않도록 오디오+비디오를 추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방송국에 들어온 후, 종편에 직접 참여한 건 처음이었다.


사무실의 첫인상은 '와 생각보다 훨씬 크네'

편집실이라고 쓰인 방이 10개는 훌쩍 넘고, 컴퓨터는 수십 대에, 직원분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솔직히 약간 놀랐다. 이런 시스템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자막 넣고, 배경음악 깔고, 애펙 켜서 모션그래픽 좀 만지고... 사실 이런 건 쭉 그냥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프리랜서일 때는 'No copyright BGM', '무료 효과음', '무료 폰트'를 찾아 헤맸고, 회사에서 유투브 콘텐츠 만들 땐 끽해야 디자이너 분에게 일러스트 파일 받아 조금 수정해서 만드는 식으로 해왔으니(집이나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뚱땅거린다), 이렇게 인프라를 갖춘- 비디오+오디오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다.


이날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자막 넣기'

물론 프리랜서 시절 수백 번은 더 해봤던 일이다. 내용에 맞는 내용을 고민하고, 적당히 센스 있게 넣기.


하지만 여기서는 정말 달랐다. 이미 모든 게 만들어져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작업할 컴퓨터엔 자막 파일이 깔려 있었고(작가진이 적은 텍스트를 가지고 종편실에서 만들어 준 일러스트 파일),  프로그램을 켜고 쉼표 키(삽입 단축기)만 누르면 됐다. 나는 In점과 Out점만 타이밍에 맞춰서 확인하면 끝인 상황.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나는 '쉼표(삽입)'와 'Delete(삭제)', '스페이스 바(재생)'를 반복해서 눌렀다. 마치 기계처럼. 그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자막 클리어.


그러고도 한참을 더 있었다.

대부분 지켜보는 일이었다. 가끔 원하는 방향을 설명하면서, 이 작업이 잘 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게 전부였기에. 종편감독님이 그래픽 작업하는 모습, 성우님께서 더빙하는 장면, 음향감독님이 믹싱하는 모습도... 함께했다. 참여한다기보단 뒤에서 바라보는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PD가 '실제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날은 그렇게 느꼈다.)


50분짜리 아침 정보 프로그램인데 종편하는 데 하루 종일 걸렸다. 결국 새벽에 퇴근.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첫 번째, 아~ TV 프로그램 제작 과정은 정말 번거롭다.

정말 모든 프로그램에 굳이 이런 종편과정이 필요한가? 실제 시청자가 그 정도의 수고를 원하는가? 인지하는가? 알아주는가? 냉철하게 봤을 때 이런 후반부 작업이 그만큼 중요한가? 대폭 간소화해도 되는 거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샘솟았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런 과정을 처음 겪은 나로서는.


다음은 두 번째, 아- 이런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 게 프로그램 제작 의 질서구나.

프리랜서&계약직으로 일하며 이제껏 내가 우당탕탕 어설프게 처리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다 세세하고 전문적으로 나뉘어 누군가의 밥벌이가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유투브 PD일 때는 내가 모든 걸 다 했는데 여기선 아니다. PD의 역할은 직접 하는 것이 아닌 모든 걸 조율하는 것에 가깝다. 종편이든 뭐든, 그게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 생태계에서는 어쨌든 이런 주변인(?) 과정을 무조건 지나야 한다는 걸, 실감했다.


마지막, 그렇기에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

PD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별로 없다. 프로그램 제작은 팀 단위로 이뤄진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다 한들 함께할 동료가 없으면 무형일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아이디어를 각 스태프에게 얼마나 잘 전달하고 함께 실행하느냐다. 그러니까 정말 PD에게 필요한 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던지 신뢰할만한 모습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그 자체로도 엄청난 능력이다.


 당연하게도 다짐했다. 나 혼자 해낼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을 항상 봐야겠군.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면,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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