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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파리의 조향사

Les Parfums을 보고

by 앙티브 Antibes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아니 잔잔한 영화가 일상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것을 방치하는 편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다양한 영화 장르를 섭렵하는 편이지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이 난무한 영화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 사라지거나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스스로 판명 내린 바 있고, 그동안 억눌렸거나 해묵은 감정들을 순간적으로 배출해 버리거나,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격하고 어려운 환경에 나 자신을 밀어 넣고 간접체험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것 같다.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에 큰 거부감이 있는 편이다.

물리적인 힘은 순간적일 뿐, 절대 영원할 수 없고,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상대방의 마음을 진심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부터 살펴보아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물리적인 힘으로 제압을 당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고, 제어당함의 표식을 상대방에게 제공한 적은 있으나, 결단코 마음을 내어 준 적은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아이를 키워보니, 강압 (물리적인 폭력의 형태가 꼭 아니어도, 강압적인 태도, 화 등의 상대방의 납득이 동반되지 않는 소프트웨어적인 강압도 모두 포함한...) 으로는 아이의 마음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일상의 나날들에서 계속 remind 당하고 있다.


오히려, 메시지가 있는 말,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 메시지를 스토리를 통해 전달하는 연극, 영화가 그 이미지와 대사, 장면, 배경 음악들과 함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내 삶을 잔잔히 노 젓고 있는 것 같다.


Les Parfums (한국어 제목으로는 향수: 파리의 조향사)가 그런 영화 중 하나다.

2019년 영화이지만, 비로소 최근에 접한 영화로, 프랑스 영화라는 점 (프랑스에 조금 진심인 편이다. 남프랑스에서 3년간 살기도 했었고, 아이도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와인을 포함한 음식 문화, 음악, 영화, 책 등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과 'Dix Pour Cent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에 출연한 Grégory Montel과 연기력이 일품인 Emmanuelle Devos가 출연한 영화라서 발견한 순간, 즉시 구매와 시청 모드로 진입했다.


Emmanuelle Devos는 조향사, Grégory Montel은 운전기사.

두 사람이 사는 삶은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있지만, 또 각자의 삶에 각자의 상처와 아픔이 있어 왔지만, 우연한 조우를 통해 서로의 삶에 조금씩 들어감으로써, 서로의 삶에 영향을 조금씩 끼치는, 잔잔한 스토리 라인이다.

이렇게 정리하니 몹시 싱겁고, 상황과 배우만 다를 뿐, 이런 컨셉의 영화는 그 동안 참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첫 만남과,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상황, 그리고 반전 등이 잔잔하게 흥미롭다.

특히, 두 사람의 연기력이 몰입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Emmanuelle Devos가 여러 향을 어두운 방에서 시향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고 (단지 그냥 향을 여러 번 맡을 뿐인데, 왜 그렇게 몰입이 되는 것일까. 섬세한 손놀림과 몸짓, 진지하고도 기품있는 표정이 아니 온몸으로 본인의 직업을 연기하는 모습이 진심 매력적이다), 진짜 운전기사인 듯 그리고 10살짜리 딸 아이의 양육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파리의 임대주택가에 사는 소시민 Grégory Montel의 인간적인 연기도 잔잔한 감동이 있다.

Grégory Montel의 손에 미약하게 남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사용한 비누) 냄새를 차 안에서 즉시 맡고, 그 화장실로 폭풍치듯이 쳐들어가 연신 냄새를 맡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사용 중이던 비누를 사려고 하는 Emmanuelle Devos의 모습이 담긴 장면도 자꾸 보고 싶은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만큼 그녀의 삶에 진심이고 그녀의 일에 진심인 모습이 잔잔하게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그런 진정한 열정이 내 삶에 있는 것일까 하는 반추 때문이리라.


Dior J'adore 향수를 만든 조향사 중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날리지만, 이후 아픔을 겪고 지금은 공장 매연 악취를 제거한다거나, 핸드백 가죽의 향기를 순화시키거나, 각종 방향제 향을 만든다던지 하는 B급 조향사로 전락한 Emmanuelle Devos. 그러나 그녀의 '조향'과 '향수 (Les Parfums)'에 대한 진심어리고 강한 열정이,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어색한 여린 인간미가 애잔한 영화.


결국 '사람의 향기가 다른 사람에게 스며드는 일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이벤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는 영화.

내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은근히 스며드는 그런 이벤트들은 얼마나 있어 왔을까.


오늘 밤에도 얼마 전 새로 모셔온 프랑스 와인과 함께 Les Parfums을 천천히 돌려보리라. 와인이 잔잔히 온몸으로 스며들며, 영화의 감동을 더 해 주리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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