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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May 30. 2020

할머니 전 상서

진정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위안부 할머니 문제

먼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너무나도 재밌고 감동적으로 보았던 한 명입니다. 할머니께서 힘들게 보내신 수모와 굴욕의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시며 딛고 이겨내시는 모습에서 인륜성과 정의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용기 내신 할머니들 덕분에 이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특정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와 사회의 문제, 나아가 세계사적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곳에 전해지는 뉴스를 통해 작금에 일어나는 일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간 할머니께서 겪으시고 지내오신 크거나 작은 일들의 자초지종을 저로서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웬지 저의 생각쯤은 말씀드려야겠다는 외람된 생각이 들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가사회적 세계사적 이슈가 되었다고 해도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할머니 개인의 문제에서 출발함은 자명함 사실입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와의 위안부 합의 건도 할머니 개개인 분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안을 수용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의사를 폄하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할머니의 삶에 대한 보상이고 할머니의 선택은 개인적인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대한민국이 지고 있는 역사적 빚의 청산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할머니 한두 분께서 위안부 합의금을 받고 끝내신다고 하더라도 끝나지 않는 국민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할머니께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사적인 관심이자 범인류적인 인권의 영역으로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제는 개인이나 국가적 치욕을 넘어서 세계사적 보편타당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연유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사람들의 정의감을 상기시키고 전 세계인의 인륜성에 호소해왔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도 하지 않을 때 할머니와 함께 그것을 이루어 온 것도 그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저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긴 한데, 어항 속에 떨어진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물고기처럼 때를 만났다는 듯이 달려드는 아귀 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덜 채워진 논리와 보편적이지 않은 상식으로 여론을 입맛대로 호도하려는 언론과 일부 보수 세력이라 불리는 친일 세력이 그들인데, 아무리 그 사람들의 주장이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해도 우리의 역사적 정당성과 도덕성을 통째로 그들에게 넘길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을 옹호하고 그들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 이외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할머니를 욕보여 왔던 사람들의 주장에 그들이 동조하여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편들겠다고 이 글을 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을 편들거나 욕하는 것은 할머니의 몫이지 저로서 감당할 부분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그저 개인이나 단체의 불법적 사실이나 오류가 있다면 그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면 될 일이라는 다소 거리감 있는 사리분별 외에는 지닌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개인적인 일탈이나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판단할 문제도 아닙니다. 이 먼 곳까지 전해지는 언론의 행태를 보면 유추되는 개인적인 판단은 있지만 말입니다.


다만 적어도 30년을 한 분야에서 희생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0년 정도의 시간을 오로지 한 분야에 헌신했다면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설왕설래에 대한 저의 판단과 사고의 출발 지점은 여기에 있으며, 마치는 지점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삶 전체를 통해 대의와 인도주의적 실천에 이바지해 온 사람이라면 그것이 크건 작은 일이건 혹은 드물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들이 향했던 사회적 정의가 오히려 정의도 없고 인륜성 따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리에 의한 난도질로 무너지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을 빼앗기는 그러한 경험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살아간다는 시대의 우리지만 그리 멀지 않은 얼마간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의로운 자산을 잃어야 했습니다. 물론 할머니를 불편하게 만든 그가 과연 그런 사회적 자신이 될만한 그릇인가에 대한 평가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만 할머니께서 겪으신 고초를 해결해보자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0년을 같이 하셨으니 그 진정성 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저는 개인의 사리사욕 만으로 그런 실천을 해내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직도 저에게는 성선설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모양인데, 아무려나 거기서 출발하면 흐렸던 것들도 맑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문제를 너희들이 뭘 알아'라고 잘라버리시면 한편으로는 그동안 함께 눈물 흘리고 작으나마 정성을 담아왔던 국민들에게 너무 박정하게 대하시는 건 아닐까도 싶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책임은 책임이고 헌신은 헌신이다'라고. 맞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마저도 부정한다면, 남들처럼 외면해도 될 일을 한평생 매달려 온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염치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끄럽게 떠들 일도 아닙니다. 지금 떠드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문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풀어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소녀상이 꼴 보기 싫었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문제를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일을 꾸미고 국민적 지지를 받는 단체가 눈엣 가시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특정 개인을 문제 삼아 욕을 보이고 특정 단체를 해체시켜 버리면 이 문제의 원인이 해소되고 우리 사회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두 잊고 돌아앉아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착각일 겁니다. 우리 국민은 돌아앉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또 말합니다. 정파주의적 성향을 보여왔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개인의 불법적 이득을 취한 일탈을 탓한다면 모를까 정파주의라니요. 위안부 문제처럼 국가 사회적, 세계사적 이슈를 다투는데 정파주의를 따지는 무리는 아마도 그에 반대하는 반인륜적 친일 세력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러한 인륜성에 대한 문제에 달려들어 해코지하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말 그대로 정파주의적 떡고물을 얻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습니다. 힘들게 쌓아 온 그러한 정의가 악의에 의해를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뭐 묻었다고 똥 묻은 개에게 물어뜯기는 꼴이 너무도 싫은 것입니다. 저의 치졸하고 속된 정의(正義)는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영화 속에서 당당하셨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의 정의가 훼손되지 않고 오랜 노력에 대한 신실한 보상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온 삶을 통해 온 힘을 다해 오신 할머니들과 그리고 할머니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실천해오신 분들께서 그동안 노력에 비해 크나큰 상처를 입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외람되나마 몇 글자 올렸으니 할머니의 넓은 해량을 바라겠습니다.


캐나다 시골 동네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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