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나다 이군 Nov 04. 2018

어차피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면 Marry me!

코나 -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음악은 이미지다. 음악은 단순히 소리 뿐만 아니라 공감각적 형태의 소스로 저장되었다가 재생될 때 다시 그 공감각적 형태로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는 이름하여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나에게 추억은 음악을 틀면 활성화되는 이미지 파일들로 저장되어 있다. '그 남자의 음악다방'에서는 음악에 얽힌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추억의 이미지를 통해 소시민적 삶의 단면을 담아보려 한다.




누군가의 세레나데는 찬란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지만 그게 어때서, 어차피 행복이란 그 자체가 찬란한 게 아니라 행복한 가슴이 찬란하게 불타오르는 걸.



피곤한 퇴근길에 무심코 내다본 버스 창 밖. 이수교차로 갯마을 버스정류장에 붙은 광고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서 있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불현듯 '저 모델들 참 행복해 보인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 같다.' 생각이 들자, 모델들이 표현하고 있는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어떻게 나의 마음을 전할까 며칠 밤낮을 고민하고, 그녀가 받아 줄는지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말을 하던 그 순간.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설레고 아련했던 때가 있었을까? 석양이 내리기 시작한 아무도 없는 석모도 하리 포구. 찬란하지는 않았지만 붉그스레 노을이 시작되던 그 이른 여름의 세레나데.    


2010년 09월 29일(수), 맑고 가끔 구름




    환절기 맞이 대청소의 날. 집안 곳곳을 정리하던 중, 남자는 여섯 달 전 이사한 이후로 지금까지 옷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박스 하나를 발견합니다.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를 쓸어내리며(옷장에 웬 먼지?) 공책 한 권을 꺼내어 드니 십육 년 전 일기장입니다. 오래된 일기장이나 노트를 꺼내어 넘기다 보면 가끔은 그 글을 쓸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위의 일기도 그랬습니다. 인생을 걸고 그녀에게 말해야 하는 그 순간. 십육 년 전 석모도의 늦은 오후, 그때의 바닷가 석양 속으로 그도 모르게 빨려 들어갑니다.


    남자에게 석모도는 여러모로 인연이 많았던 섬입니다. 대학교 졸업 후, 첫 번째 직장의 동료였던 '바다의 왕자, 주꾸미' 문 대리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회사에서는 워크샵이나 단합대회를 석모도에서 개최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문 대리가 서강대학교에 합격하던 날, 석모도 곳곳에는 플랑카드가 붙었더랬다는 전설을 자기 입으로 일일이 설명하던 그였습니다.


    남자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던 경주 김 씨 집안의 어떤 젊은 처자 역시 그러한 연유로 석모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남자가 모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그게 언제였던가 아무튼 함께 석모도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석모도의 압권은 비록 짧은 거리지만 배를 탄다는 것과 배 위에서 새우깡으로 교감하는 갈매기 타임입니다. 섬이 작아서 드라이브로 일주하기에도 부담이 없고, 보문사 돌계단 끝에 드러누운 불상의 시선으로 해지는 서해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알 수 없는 감흥으로 가슴 설레게 합니다. 이런 석모도가 철종인가 조선시대 언제쯤에 바다를 메워 두 개의 작은 섬을 하나로 묶어놓은 간척지라는 사실에 더욱 흥미로운 곳입니다.


    |노을 보러 가자


    두 사람이 함께 석모도를 찾은 이유는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저 노을이나 보고 오자는 남자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석모도는 영화 '시월애' 촬영지 부근으로 간간이 사람이 보일 뿐, 유난히도 인적이 드물었고 한적했습니다. 남자는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을은 무슨 노을, 내심 오늘은 말을 하고 말리라 각오를 새기면서 며칠 동안 궁리한 다짐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 궁리의 한편으로 염려도 있었습니다.


    '나의 계획을 눈치챘으려나? 알고 있으려나, 그래도 말은 해야겠지?'


석모도의 노을. 아마도 하리포구에서 찍은 사진이라 확신한다. [이미지출처:샘이깊은물]


    하리 포구. 말이 포구지 배 몇 척 본 적이 없는 아주 조그만 나루 같은 곳입니다. 별것 없는 포구에서 두 사람은 짧은 방파제를 나섰다 돌아왔다, 걸터앉았다 일어났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해는 중천에서 기울었지만 뿌옇게 운무 같은 게 낀 하늘은 시간이 되어도 노을이 찬란하게 혹은 그럴싸하게 불타오를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 이래 가지고 노을이 지겠어?


    그녀가 한 마디 합니다. 그녀도 눈치가 있는데, 그녀의 말은 '새삼스럽게 무슨 노을이냐. 할 말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얼른 해. 그리고 빨리 가자'처럼 들렸습니다. 남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을 엽니다.


    | 저기.... 지난번에 이메일로 보내 준 노래 있잖아,


    그녀가 고개를 돌려 쳐다봅니다. 바닷가라서 바람이 그녀의 긴 생머리를 가만 놓아두질 않습니다. 한 손으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으며 호기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남자는 짧은 순간,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내 현실로 돌아온 남자는 하지도 않은  그녀의 말을 표정에서 알아챕니다. '자, 이제 그만 질질 끌고, 어서 빨리 얘기하라고.'


    애써 모른 척, 남자는 준비한 다음 대사를 낭독합니다.


    | 그 노래 가사처럼 때론 모자라고 때론 넘쳐서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음...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라고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외워서 하는 발표는 한 대목에서 막히면 전체가 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항상 준비된 한 가지 대사, 그것도 기, 승, 전 없이 결론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입니다.


    | 음, 그러니까..... 내 말은.... 남들처럼 손에 물 안 묻히게 하겠다거나 뭐 그따위 장담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니까 뭐냐, 최소한 살아가면서 가족을 위해서 한눈팔지 않고, 또, 죽을힘을 다해, 정말, 열심히 살아갈게.라는 약속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내 말은 뭐냐면, 나와 결혼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남자는 '너도 결국은 내가 이 말할 줄 알았지?' 생각합니다. 이때 그녀의 한 마디,


    | 촌스럽긴.


'아, 예, 촌스러웠군요. 자기도 기다렸으면서...' 그녀의 반응에 살짝 당황한 남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남자의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살짝 입술에 입술을 대고는


    | 바보야. 그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가자. 노을 보기는 틀렸다.

    | 대답은..?

    | 바보야. 대답했잖아.

    | 언제?

    앞서서 포구를 벗어나는 그녀를 재빠르게 뒤따르며 남자는 '왜 나는 뭐든지 구체적으로 얘기해야 하고, 그녀는 얼렁뚱땅 해도 되는 걸까' 생각에 잠깁니다. 하긴 프러포즈라고 하기엔 딱히 트렁크를 열면 주유소 풍선이 나와서 춤을 춘다거나, 수백 개의 풍선이 날아간다거나, 머핀 빵에서 반지가 나온다는 등의 이벤트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그런 이벤트를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럴 땐 그저 담백함이 최고의 조미료라고 스스로 달래 봅니다. 물론 남자의 게으름도 꽤 큰 비중을 차지했겠지만.


    아무튼 '예스' 였는지 '노' 였는지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애매하기 그지없었던 그녀의 암묵적 동의(?)는 현실이 되어 두 사람은 그해 11월에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두 달 후 임신한 첫 아이는 이제 만으로 열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좁은 옷장 안에 쭈그려 앉아서 펼쳐 본 십육 년 전 일기장에는 살랑살랑 바람에 실려 오던 그날의 바닷가 소금기가 배어 있는 듯했습니다. 슬쩍 미소 짓는 남자의 등 뒤로 매서운 칼바람이 들이칩니다.


    | 청소하라니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목소리는, 바로 그녀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오늘처럼 게으름이라도 피우는 날이면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 예전엔 어떻게 손 한 번 잡아보려고, 뽀뽀 한 번 해보려고 온갖 난리를 피우더니, 이젠 아빠가 엄마를 소 닭 보듯이 한다. 그래 봐. 당신, 나이 먹고 힘없을 때 서러워하지 말고 지금 잘하셔.


    에라 모르겠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CD 한 장을 집어 들고는 플레이어에 틉니다. 노래가 시작되자 그날의 마음이. 그날의 심장의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나, 너에게 관심 있다. 전 직장 동료로서가 아닌, 그저 알고 지내는 어떤 사람이 아닌, 너에게 의미 있는 한 남자가 되고 싶다. 그래도 되겠니? 그리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 이 노래 들어봐 봐.'


[노래 들어 보기]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코나


지금 꼭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깊이 생각해
한번 더 말해줄게 난 너를
너무 사랑해 누구보다 더

언젠가 틀림없이 넌 나를
좋아할 거라 생각해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미리미리 좀 잘해주기를
그렇게 흔하고 유치하고 느끼해도
조금은 부러운 사랑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러운 너의 눈동자여
아직도 모르겠니 너를 향한 마음을
때론 너무 모자라고 때론 넘쳐서
그게 좀 문제지만
넌 머지않아서 이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거야
어림없는 말 웃겠지만
이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거야


 


    그렇습니다. 나의 세레나데 곡은 코나의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를 찾으라면 아무래도 이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작이 꼬리를 활짝 펴듯이, 개구리와 매미가 목청껏 울어대듯이 내가 가진 모든 언어와 표정과 재력(?)과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설레는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 그리고 서로가 먼 길의 반려자가 되어, 힘들 땐 서로 위안이 되고, 기쁠 땐 서로 얼싸안고 춤추며, 같이 노을을 보러 황혼으로 가는 여행. 그 노을이 비록 찬란하게  펼쳐진 노을이 아닐지언정, 그리고 그 여정에 화려한 이벤트는 없을지언정 언젠가 그 끝에 가서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돌아보며 '아, 행복했다.' 말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되고 말 거라면 미리 말해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어요.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당신의 세레나데는 어땠나요?


FIN.




이 글을 발행하기 직전, 정말 우연히도 딱 그맘때 그곳 석모도의 모습을 소개한 '샘이깊은물'의 기사를 접하고 너무 반가워 링크를 걸어봅니다.

 [샘이깊은물 기사 보러 가기]






이전 01화 출발하기 딱 좋은 어떤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