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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Oct 10. 2018

출발하기 딱 좋은 어떤 날

어떤날 2 집 - 출발


음악은 이미지다. 음악은 단순히 소리 뿐만 아니라 공감각적 형태의 소스로 저장되었다가 재생될 때 다시 그 공감각적 형태로 기억을 소환한다. 우리는 이름하여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나에게 추억은 음악을 틀면 활성화되는 이미지 파일들로 저장되어 있다. '그 남자의 음악다방'에서는 음악에 얽힌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추억의 이미지를 통해 소시민적 삶의 단면을 담아보려 한다.



    
    이른 퇴근길, 저 멀리 가을빛 파랗게 머금은 하늘 한켠으로 비행기 한 대가 솟아오르고 있다. 가끔씩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거나, 아련한 기적소리를 내며 지평선을 가르는 기차를 볼 때면 종종 그러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 나도 떠나고 싶다.


    좋은 일로 건 그렇지 못한 사정으로 건 누군가는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지금 이곳을 떠나고 있을 것이다. 떠나고 싶은 건 새롭고 낯선 세상, 그  미지의 시공간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하고 지루한 것들로부터의 벗어남에 대한 바람이기도 하다. 물론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해방감 또한 후자에서 온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러기 위해선 일단 출발을 해야 한다. 출발이라 함은 지금까지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의 연을 끊고 다른 시공간으로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다. 이 행위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출발이란 말은 틀렸다. 출발이란 단어는 언제나 새로움을 담고 있다. 타임루프 영화가 아닌 이상, 같은 출발이란 있을 수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발은 항상 설레임을 동반한다.


    조동익, 이병우의 어떤날 2집에 수록된 출발이란 노래가 딱 그렇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일상으로부터의 소심한 일탈을 노래한다.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만나자고 강요하지도, 미지의 환희가 있을 것이라고 유혹하지도 않을뿐더러 떠나는 것이 꼭 좋은 거라고 강변하지도 않는다. 그냥 담담한 호흡으로 이런 건 어때? 너의 요즘은 어때?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그래 떠나보자, 그리움을 만나보자고 반응하는 건 오롯이 나 자신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일인칭이 되고 카타르시스가 된다.



출발

어떤날


하루하루 내가 무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진 엇비슷한 의식주
나는 만족하더군

은근히 자라난 나의 손톱을 보니
난 뭔가 달라져가고

여위어가는 너의 모습을 보
너도 뭔가 으음

꿈을 꾸고 사랑하고
즐거웠던 수많은 날들이

항상 아득하게 기억에 남아
멍한 웃음을 짓게 하네

그래 멀리 떠나자 외로움을 지워보자

그래 멀리 떠나자 그리움을 만나보자

꿈을 꾸고 사랑하고
즐거웠던 수많은 날들이

항상 아득하게 기억에 남아
멍한 웃음을 짓게 하네

그래 멀리 떠나자 외로움을 지워보자

그래 멀리 떠나자 그리움을 만나보자


<노래 듣기>


    어떤날의 출발을 들으면 두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경춘가도를 달리는 구식 프라이드 자동차 한 대와 충무로 장고웅 레코드사가 그것이다.


장면 #1, 명보극장 건너편 장고웅 레코드에서 CD 한 장 사들고 마치 먼 여행을 떠나듯 콩닥콩닥 설레던 모습이 지금도 CCTV처럼 남아있다


    사람들은 충무로를 영화의 거리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음악인의 거리이자 광고/출판의 거리이기도 했다. 대학교 시절 학회지를 제작하기 위해 며칠씩 들렀던 곳도 충무로였고, 대학 졸업 후 광고판에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던 나는 종종 충무로에 들를 일이 많았다. 워낙 영세자영업자 밀집지역이다 보니 싸고 맛있는 맛집들도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충무로 하면 제일 먼저 주꾸미와 골뱅이가 떠오른다. 그리고 후식으로 마시던 쌍화차(사실 쌍화차는 남대문시장 이미지가 더 강하긴 하지만)까지.


    골뱅이 맥주집이나 주꾸미 양념구이 집에 둘러앉아서 그날그날의 회포를 풀기도 하고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골뱅이 무침 속에 있던 북어포의 질깃한 질감은 아직도 나의 감각 속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리고 명보극장 사거리에서 건너편, 스카라 극장이 있던 그 앞쪽으로 장고웅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한마디로 요즘의 예능인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장고웅이란 이름은 연식이 좀 되신 분들은 기억하실 테니 검색으로 찾아보시기 바람) 벤츠와 포르쉐의 한국 홍보를 맡고 있던 나는 당시 개봉한 조지 클루니 주연의 피스메이커란 영화를 벤츠 고객을 초청하여 시사회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밤늦게 행사를 마무리하고 늦은 저녁 삼아 동료들과 골뱅이 맥주 한 잔으로 뒤풀이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침 장고웅 레코드가 눈에 들어왔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 장고웅 레코드에 들러 CD 한 장을 구입했다. 그렇게 하여 어떤날 2은 나에게 넘어왔다.



    일을 취미처럼 하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취미도 직업이 되고 나면 어지간해선 그냥 일일 뿐이다. 아무리 같은 행위를 해도 스트레스와 피로를 생산하면 그것은 일이다.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를 달래기 위해 '출발' 같은 음악을 틀어놓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보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일말의 도움이 되곤 했다. 어떤날의 출발에는 CD를 들고 막 장고웅 레코드점을 나서는 그 순간의 이미지가 CCTV처럼 맺혀 있다. 그 화면을 확대해 보면 지금이라도 어딘가를 향해서 떠나려는 사람의 설렘 혹은 그래 멀리 떠나보자는 다짐 같은 표정이 들어 있을 것이다.


장면 #2, 프라이드를 타고 달리던 경춘가도는 로렐라이가 있는 독일의 라인강변이 되기도 하고, 파리의 센강이 되기도 했지 말입니다


    충무로의 이미지는 햇살 가득한 경춘가도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경춘가도는 대학교 엠티 때문에 젊은 층에 인가가 높았지만 강원도 홍천에서 군생활을 보낸 내게는 시외버스에 실려 오가던 입대와 휴가의 길목으로써의 기억이 더 강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일이 안 풀려 기분이 꿀꿀하거나 지쳐서 어딘가 떠나고 싶을 때면 종종 경춘가도를 달리곤 했다.


    응답하라 1988에서 김성균이 새로 장만한 차로 나오는 짙은 쥐색의 구식 프라이드가 당시 나의 애마였다. 경춘가도를 달릴 때면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와 어떤날의 '출발' 카세트테이프를 준비하는 것은 필수였다. 여기에 연인(?)과 함께라면 오석준의 '우리들이 함께 있는 밤'까지 준비되었다면 금상첨화.

 

이미지출처:Koreancarblog 및 구글 검색 후 합성


    지금은 강 위로 고속화 도로가 지어져 곧은길을 빠르게 지나치지만, 예전엔 팔당댐을 지나면서 양평에 이르기까지 강변을 따라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왕복 2차선의 시골길이었다. 중간에 시골밥상 같은 밥집이 있어 가끔은 허전한 속을 가득 채워주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고, 만났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강을 따라 달리며 마음을 달래던 길이었다.


    노래를 틀어놓고 목청껏 따라 부르며 이 길을 달릴 때면 길은 종종 로렐라이가 있는 독일의 라인강변이 되거나 프랑스 파리의 센 강변이 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기 위해 베르길리우스 함께 건넜던 망각의 강 레테 되기도 했다. 어떤날의 출발과 함께 달리는 경춘가도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경험을 주는 그런 피안의 길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기운을 소진하고 나서는 또다시 세상과 맞서 버텨낼 힘을 공급받아 돌아오곤 했다.


    지금보다 나이가 적었을 땐 그렇게 불쑥 떠나곤 했다. 신새벽에 퇴근하다가 혹은 집에서 TV를 보다가, 때로는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동해 일출을 보자며 혹은 태종대에서 회를 먹자며 무작정 떠나곤 했다. 나이와 함께 찾아온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야겠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무거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지금은 왜 그러지 못할까. 


    출발의 끝에는 만남이 있다. 어쩌면 그 끝에 있는 무언가를 만나기가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움이든 외로움이든 까짓 거 한 번 떠나서 만나보는 게 어떨까.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다. 오늘도 출발하기 딱 좋은 그런 어떤 날이다. ♧





뱀발) 더 클래식 출신의 김동률의 '출발'이란 곡도 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춘천 가는 기차', '우리들이 함께 있는 밤'도 각각의 사연으로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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