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해보지 않은 배부른 소리일 수는 있으나, 여느 살인자에 대한 판단이 그러하듯이 '그 누구도' 누구의 생명을 앗아갈 권한은 없다는 의미에서 사형 제도를 반대했었다. 그 생각은 여전히 나에게는 유효한데, 자살의 경우는 좀 애매한 지점이 있다. 자신의 삶을 오롯이 자신이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즉 자유의지 발현의 끝판왕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다는 측면과 함께 '그 누구도'의 범주에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는 측면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공인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한 사람의 죽음은 주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의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죽했으면'이란 생각을 먼저 갖는 듯하다. 배려심 혹은 동정심의 끝판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이선균 씨의 행적이나 혐의에 대해 아무런 판단이 없었다. 연예인에 대한 보통의 인식과 다르지 않게 그럴 수도 있겠지 정도의 생각이었다. 내 생활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나서 세상이 다소 시끄러워지고 있다.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그의 처지와 그의 고통스러웠을 상황에 자신을 대입시켜보기도 하고 마침내 그의 선택에 '오죽했으면'을 대입시킨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남의 일이니 흉이나 보고 있다가 이제서야 동정심을 몰고 온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에 관여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결국 정치적이든 생존의 문제이든 나의 행동은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 모든 세상사에 모두 관여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내가 그를 동정했다고 해서 그의 선택이 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죽했으면'이란 수사는 당사자가 그런 선택을 하게 끔 만든 배경, 환경 혹은 대상을 두고 이르는 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동정심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경찰이 그를 죽였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경찰 조직이 정치적이었든 의도적이었든 담당 형사는 형사로서의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너무나 많은 나쁜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반응에 무뎌졌을 것이고, 그저 해오던 관습대로 익숙한 방식으로 그를 대했을 것이다. 이제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한다고 한다. 그렇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은 제발 여기서 멈춰 달라고 마지막 수를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건의 잘잘못을 떠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안은 채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난 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다. 여기 조그마한 부끄러움에도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부러지고 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지간한 부끄러움에는 꿈쩍도 않는 불휘 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는 보통 부끄러움에 불감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법으로 정했던 관습적이던 누구나 죄를 지을 수는 있다. 담배꽁초 하나 길거리에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다지 호기롭지 못하고 심지도 약한 나는 아마 친일이라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행동 자체에 있지 않고, 그런 행동을 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녔는 가에 있다. 추측건대 이선균 씨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상황 그 자체로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그를 아는 모든 이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부끄러움을 지녔다는 이유에서 이선균 씨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의 기준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흔히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뻔뻔하다고 얘기한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나서 울분이 끓는 것도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그들의 뻔뻔함에 분노하는 것이고, 어려운 사람들 등 처먹거나 나라를 팔아먹었거나 용서할 수 없는 건 그들 중에 뻔뻔한 자들이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죄를 지었을망정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죽했으면'이라고 말로 뒤늦게나마 위로하는 것이다. 자신보다 사랑받는 동생을 죽이고 평생을 부끄러움으로 살아 간 카인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러한 부끄러움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그런 사람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때는 항상 창피한 마음을 지녀야 했고,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 때는 당당하게 코리안을 외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없이 창피한 조국을 바라보고 있다. 이선균 씨의 영면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