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페미니스트를 위한 변명
성의 역사에 있어서 폭력성과 강제성으로 점철된 혹은 권력으로써 남성우월주의 혹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 부당성을 나는 인정한다. 또한 나는 여성이 사회 구조적 혹은 정서적, 관습적 이유로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폐단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역기능들이 정화되어 차별과 불형평이 사라지는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길 주저한다. 아니 오히려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게는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약간 다른 생각을 지녔으며, 또한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실천과 행동에 더러의 의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평등, 성의 해방을 지지하지만 그보다도 난 하나의 인간으로서 주체적 객체로서 한 인간이길 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성적 다름에 상관없이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확보하는 일,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이런 나의 사유에는 20대에 보아 온 여러 인물 군상에 기인한 바가 작지 않다. 당시 이대, 신촌 등의 대학가에는 페미니스트 입 네하는 부류의 사람을 종종 접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길거리에서 병맥주를 손에 들고 걸으며 마시거나 담배를 당당하게 끽연하는 저항적(?) 태도를 보이곤 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페미니즘을 드러내는 단초라고 여겼던 것 같다. 비록 낮은 수준의 사례일 망정 이 또한 그들의 주장에 내재된 사유임이 부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나는 과연 남성성에 대항하는 것이 페미니즘일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사유 세계에는 당면 현상으로써 성차별과 젠더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의 근저에는 성적 해방에 우선하여 인간 존엄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형성되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다름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당연한 명제다. 남자와 여자는 생리적,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고 나서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음을 천명해야 한다. 또한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가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시쳇말로 무식하고 힘센 남자가 힘쓰는 일 하고, 여우같이 명민한 여자가 그에 맞는 일을 한다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한편으론 남자보다 활동적이고 힘쓰는 걸 좋아하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에겐 그에 맞는 일이 주어지면 된다. 남자건 여자건 그의 성향과 체질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있어 자유로워야 할 것이고, 그 결과에 있어 공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할진대 나는 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지 모르겠다. 이용당하기 쉬운 또 다른 이분법이고 진영논리일 뿐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조심스럽게 얘기의 외연을 확대해보자면 성소수자 등속의 마이너리티 문제도 동일한 연장선 상에서 이해하면 쉽다. 남과 여,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 인간의 문제에서 출발할 일이다. 나와는 생각이 혹은 생물학적 배경이 조금은 다른, 나와 같은 어떤 사람의 얘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해법은 합의와 배려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특히 이러한 이슈에 대해 사회적 합의란 것이 쉽게 이뤄질 리 만무하고, 그래서 더더욱 해법으로써의 결과가 요원해 보일지라도 인류사적으로 발전해 온 인권의 역사를 믿는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개개인이 주체로서 깨어있는 한 역사는 발전한다.
PS)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그로 인한 재취업의 문제
출산으로 인한 인적자원의 누수 혹은 공백이 회사 조직을 경영하는데 애로사항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의 사회활동을 발목 잡는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은 대목이기도 한데, 이것은 비교적 비경제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복합적인 의미에서의 출산(물론 출산이란 행위가 경제 행위와 분리된다는 얘기는 아니다)이라는 행위가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기업활동과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문제일 것이다.
해결책은 여기 사회적 합의에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이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 대우를 막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사회적 합의와 함께 앞서 언급했듯이 상호존중을 근간으로 하는 개인 간의 배려가 중요한 문제인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합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데, 과연 이를 위해 노동력의 손실이라 인식하는 고용주의 태도가 바뀔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