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연쇄살율마의 고백
율마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어느 화원이었던가는 모르겠지만 그 자태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한 그루의 나무같기도 하고 허브의 다발 같기도 했던 첫인상. 여린 초록빛이 선명하고, 가늘고 부드러운 침엽이 촘촘하게 자라난 모습. 마치 작은 숲 속을 옮겨다 놓은듯한 푸르른 나무. 냄새는 또 어떠한가. 가만히 쓰다듬으면 은은하게 레몬을 닮은 신선한 향기가 손끝에 피어난다. 생김새와 꼭 닮은 상쾌하고 아름다운 향기에 마음까지 설레던 아이.
푸릇푸릇한 모습이 일상의 작은 행복이 되리라 생각하고 집에 데려왔던 율마다. 하지만 슬프게도 율마는 내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데려오면 죽고, 또 데려오면 죽고... 율마를 키우려고 하던 나는 어느샌가 최악의 연쇄살율마가 되어있었다. '이건 아니야.' 더 이상 데려오는 건 율마에게나 나에게나 못할 짓임을 깨닫고 이후로는 절대로 율마를 데려오지 않게 되었다.
사실 나는 율마를 제외한 식물은 잘 키우는 편이다. 대단한 노하우를 가진 것은 아니다. 내 비결은 잘 죽지 않기로 유명한 아이들만 데려와 키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파티필름이나 꽃기린, 테이블 야자 같은. 이런 식물들은 내가 물을 좀 깜빡해도, 물을 평소보다 많이 줘도 까다롭게 구는 법이 없다. 조금 부족하게 관리를 해도 반짝반짝 빛나는 새 잎을 내고 꽃을 내밀기도 한다.
우리 집에는 화초가 조금 많은 편이다. 베란다에도 있고 거실에도 있고 벽에도 매달려 있다. 평소 식물과 함께 하는 인테리어를 좋아하는 편이고, 아이들도 식물을 좋아해서 좀 많이 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율마는 예외였다. '율마는 내게는 너무 어려운 식물이야. 욕심나도 데려오면 안 돼. 서로에게 해로울 짓은 하지 말자.'
그런데 올봄에 율마를 선물로 주신 분이 계셨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음을. 누군가의 손에 들려 우리 집에 온 율마는 여전히 푸르고 아름답고 향기로웠고,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율마를 죽이지 않겠다는 작은 다짐을 했다. 이렇게 율마와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보통 율마는 과습으로는 잘 죽지 않는다. 물을 굉장히 좋아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고사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나도 여태 율마를 고사로 보내? 왔다. 그래서 이번엔 물주는 텀을 짧게 가져보기로 했다. 물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이니 1주일에 한번 또는 화분이 가벼워지거나 화분 위의 장식돌이 완전히 마르면 물을 주기로 정했다. 보초를 서듯이 율마를 돌보았고 이번 율마는 마치 내게 보답하듯 잘 자라주었다.
한 달 반이나 되었을까? 건강하게 자라는 율마를 보며 이제는 잘 키울 수 있다는 내적 자신감이 올라왔다. 자연스럽게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율마가 한쪽으로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는것이 눈에 띄었다. 율마는 과습이 되거나 물이 부족하면 새카맣게 탄 듯이 말라버린다. 이번엔 과습이 문제였다.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율마라도 적정선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번에도 연쇄살율마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할 예정인 것 같았다.
'이번엔 정말 잘 키우려고 했는데....' 아쉬움도 아쉬움이지만 선물 받은 건데 다음에 오시면 뭐라고 말씀드릴 것인가. "사실 말을 안 했었는데, 제가 연쇄살율마여서요. 율마를 계속 죽이거든요. 죄송해요." 하아.
황망하여 새카맣게 변해버린 부분을 잘라내지도 못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때 되면 물을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화분 위의 장식돌이 마른 듯하면.
그러기를 한 달. 신기하게도 율마는 새카맣게 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직 잘 자라고 있다. 마치 아수라 백작처럼 절반 정도는 시커멓게, 다른 절반은 연한 초록색을 보여주고 있다.
'쟤가 다시 살아나려고 저럴까? 희한하네.'
나는 조금 의아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아는 율마는 변하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나무 전체가 완전하게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반 정도만 남겨두고 살아나는 경우는 드물다. 마지막 기회다 싶어 변한 부분을 부리나케 솎아내 준다. 다소 빈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율마다. 다시 보초를 서는데 이번엔 텀을 조금 더 길게 보며 물을 주기로 정했다.
율마와의 인연이 여기까지인지 아니면 더 길게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아직도 조마조마하고 일 없이 베란다에 나가서 율마 화분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저 아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주책스럽게 물을 너무 많이 주는 주인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나 궁금해진다.
나는 율마 키우는데 재주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으면 하고 바란다. 저 아이가 우리 집에서 긴 시간 연한 초록빛으로 있어주었으면,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 곁에 남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