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게임에서 빙고게임으로.
자리는 정해져 있다. 남은 건 오직,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느냐 뿐.
캠프를 시작하며, 아니 어쩌면 처음 유니폼에 몸을 넣은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몇 개 되지도 않는 자리를 사수하기 위한 목숨을 건 사투에로 가깝게, 가깝게 내몰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자 뺏기 마냥. 치열한 경쟁, 승리를 위한 몸부림, 처절한 각오, 혈투, 그리고 결과. 이것이 모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정이자 곧 자격이 된다. 모두가 그랬다.
본 무대를 앞둔 지금. 최종 리허설에서 연거푸 쏟아지는 온갖 경쟁의 결과들이 우리를 웃고 울릴 시간.
이미 몇 번이나 말했듯, 정작 우린 이러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지난해, 아들내미는 생애 최초, 최대 규모의 대회에 출전했다. 나 또한 이 녀석 덕분에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몸뚱아리를 이끌고 수십 년 만에 다시 참가한. 휘날리는 만국기 아래, 부모들만 목숨 거는 유치원 가을 운동회. 날씨마저 가을스러운 작년, 어느 날이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개인 종목은 장애물 달리기 하나였다. 첫 출전에 종목은 단 하나. 물러설 곳도 없고, 망설일 여유도 없다. 가라, 아들몬. 너로 정했다.
4인 1조로 한 조씩 출발을 거듭하여, 드디어 아들 녀석의 조가 출발선에 섰다. 티 안 나게 라인 끝을 슬쩍 밟은 운동화, 앞으로 살짝 구부려진 상체와 심장만 남은 듯 요동치는 뱃속. 모든 신경을 고막에, 시선은 결승점에. 빨려들 듯 출발선에 선다. 출발선. 준비. 준비. 시....
알지, 알아 이 기분. 모르는 사람 없지. 우리 모두 선수 출신이잖아.
강당이 떠나가라 울려대는 환호성과 응원 사이로 아들내미가 첫 발을 딛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긴장한 걸까, 상대를 견제하는 걸까 녀석이 옆 라인을 흘긴다. 앞으로 제 삶에서 수없이 만나게 될 장애물들처럼 거대한 풍선 구조물에 대차게 올라타서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재빨리 동그란 틈으로 작은 몸을 던진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연신 같이 달리는 상대들을 살핀다. 결승점에 도달했지만 알록달록한 결승 구조물 덕분에 내 눈으로는 판독이 불가하다. 그래도 장애물까지 선두 그룹에 있었으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녀석을 기다린다.
나름 아빠가 왕년에 뜀박질은 제법 했단다. 엄마도 너 낳고 체력이 좀 달려서 그렇지 잘 달려. 그러니까 아들, 다 제쳐버려!
모든 조의 경기가 끝내고 아들이 줄을 맞춰 관중석, 내 앞을 지나간다. 정상에 우뚝 올라선 눈빛. 무심한 척, 티 안 내려 노력하면서도 잔뜩 치솟은 어깨와 쇼미더머니처럼 건들대는 걸음걸이. 장하다. 네가 해냈구나. 넌 내 아들이다.
이후 레크레이션에 가까운 몇 종목이 끝나고 잠깐의 휴식 시간. 드디어 아들을 마주했다. 자, 어서 달콤한 결과를 내 귀에 뿌려다오.
다른 팀은 1등이 한 명인데, 우리 팀은 1등을 세 명이나 했어. 우리 팀 진짜 빨라! 아니, 뭔 소리여. 너 몇 등이냐고, 너. 그리고 나 여기 도장받았어. 2등! 멋있지? 2등...? 1등이 세 명이라며. 너, 네 명이서 뛰었잖아.
와. 잘했네, 잘했어. 엄마 아들이었네.
나는 끝까지 속마음은 뻥긋도 못한 채, 잔뜩 신이 난 녀석의 흥분을 잠자코 받아내야만 했다. 아빠 맘도 모르는 아들내미는 번질 대로 번진 손등 도장을 영광스레 매만지며, 세상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니가 신나면 됐지. 뭣이 중헌디.
경쟁은 정말로, 어떤 모습인 걸까.
나는 결코 경쟁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남아라, 생존해라, 차지해라, 이겨라'와 같은 거칠고 모진 모습으로만 경쟁을 폄하하는 것이 다소 불편할 뿐이다. 나는 모든 선수가 상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아 그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이 하고픈 플레이를 마음껏 펼치고자 그라운드에 선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최선의 플레이를 다 해 주어야 하며,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각자의 삶에 서리라 믿는다. 서로의 성장을 돕는 관계. 이것이 경쟁이 우리를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만약 싸우고, 쟁취하고, 이겨서 살아남는 것이 경쟁이 아니라면. 사실은 친근하고 사이좋고 즐거운 것이 경쟁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경쟁은 그 힘을 잃는 것일까.
곳곳의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얼마 전 글에서도 언급했던 The inner game of Tennis(Timothy gallwey)에서 다룬 경쟁의 모습이 가장 좋았다. 그것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경쟁을 생존을 위한 다툼이 아닌 성장을 위한 협력으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헝거게임이 아닌 서로를 위한 빙고게임으로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너와 나의 '성장'과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해서 말이다.
테니스에서 본인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장애물을 제공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상대 선수다. 그렇다면 상대 선수는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 어려운 공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상대 선수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 당신에게 가장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상대 선수의 의무이며, 마찬가지로 당신 또한 그에게 가장 어려운 장애물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경쟁은 진정한 협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놓고 본다면 우리가 이기는 건 상대 선수가 아니다. 승리와 패배는 바로 상대 선수가 제공하는 장애물을 극복하느냐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진정한 경쟁에서 패배자는 없다.
많은 이들이 테니스를 얼마나 잘 치는지가 본인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마치 경기를 잘하고, 승리하는 것을 생사가 달린 문제로 받아들인다. 어떤 이들은 최고가 되고, 승자가 되는 것만이 그들이 추구하는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을 부여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이 초래하는 비극은 눈에 드러나는 능력과 성과를 제외한 수많은 개인의 가치와 잠재력이 무시당하는 것이며, 더한 비극은 그들이 성공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믿어 온 사랑과 자존감을 성공으로는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제 목숨일랑 아껴두고, 우린 다만 성장하자.
아들 녀석은 정말이지 한껏 기뻐 보였다. 자기 팀에서 1등이 많았다는 것에 왜 그리 자부심이 넘치는 것인지 부족한 아비는 여직 잘 모르겠지만. 어쩜 녀석은 자신이 무려 1등 세 명과 함께 비등히 달려냈다는 기쁨이 승리를 놓친 아쉬움을 덮고도 남았나 보다. (실제로 녀석은 다른 조 친구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우리 조에는 1등이 세 명이나 있어!)
녀석이 달리며 옆 상대로 흘렸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누가 나보다 앞서가는지 살피는 경계심이나 저 상대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투쟁심만으로 불타오르던 제 아비의 시선과는 달리, 그저 상대가 빨리 달림에 저도 함께 점점 빨라지는 자신의 속도를 만끽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을 그렇게나 빨리 달리게 한 상대가 세 명이나 있었음에 무척 신이 났던 것은 아닐까.
녀석의 첫 대회는 그렇게 2등 아닌 2등으로 마무리 됐지만 분명한 것은, 엇비슷 달리다 결국에는 늘 자신이 이겼던 아빠와의 시합에서보다 녀석은 훨씬 빨랐고, 훨씬 빛났다. 녀석은 그곳에서 더 멋진 사람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같이 달리는 상대가 나보다 빨라서 좋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상대가 나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나보다 빠른 상대가 많다는 것을 알고는 달리기를 멈춰버렸다.
최선을 다하는 상대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아는 너는 오늘도 여전히 달린다.
경쟁이 즐겁지 않을 때, 우리 연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