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기사에서 육각형인간이란 단어가 눈에 띄게 많이 노출되어 보인다.
순간 궁금했다.
육각형인간이 뭘까?
육각형인간: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집안, 성격, 특기등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의 경향성을 일컬어 '육각형 인간'이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
트렌드 코리아 2024. 즉 "완벽한 사람"을 꿈꾼다는 말이다. 라떼의 말로 하자면 엄친아, 엄친딸정도 되겠다.
우리는 언제나 비교당하며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선망하며 살아왔다.
가장 손쉬운 비교대상은 앞집 아이, 옆집 아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SNS만 둘러보아도 비교대상이 넘쳐난다.
"저 집아이는 영어를 왜 이렇게 잘해?"
"아고 이쁜데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네"
"쟤는 해외에 또 나갔네"
트렌드 코리아 2024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는 '만인이 만인과 비교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 속 텅 빈 공허함.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그 압박을 견뎌야 하는 일부 젊은이들에게 육각형인간은 활력이자 절망의 표현이라고 한다.
아무나 육각형인간이 될 순 없으니 육각형 인간을 선망하고 체험해 봄으로써 자신의 불편함을 놀이로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불안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각형인간은 노력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대상이다.
과연 내가 내 아이에게 육각형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할 것이다.
우선은 집안과 자산면에서 바로 OUT.
집안은 어떤 집안이어야 하며 자산은 얼마를 가지고 있어야 육각형 인간에 속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만족감이란 사람마다 환경에 따라 다 다른 법이니까.
그러면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를 가진 게 행복인지 자신의 내면을 만족하게 하는지 행복인지 말이다.
가진 게 많으면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그들 또한 수많은 고민들을
떠안고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연륜이 있고 지혜가 있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 보아도 다 들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야, 자기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지"
오래 살진 않았지만 점점 이 말씀들이 마음으로 와닿는다.
내 마음의 평안함을 찾으면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모든 생각은 한 끗 차이다.
육각형의 항목을 자신에게 맞추어 바꾸면 내 인생의 육각형 인간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의 정점으로, 나만의 습관으로 만들어 낸 육각형인간의 항목은 나다움의 균형을 이루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각형인간에 어떠한 태도로 접근해서 나다움을 발현할 수 있을까?
예를 들아보자.
4학년인 나의 큰아이.
가을이는 전형적인 육각형인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자신만의 육각형 인간은 스스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아이에게 강조하고 있는 부분들을 기준점으로 생각해 보자.
인성, 자기 주도공부, 독서, 운동, 악기, 회복탄력성(취미)은 내가 아이에게 강조하고 있는 항목들이다.
이 흐릿한 점들은 점점 바턴을 아이에게 넘겨줌으로써 자신만의 점들로 생성될 것이다.
이 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뚜렷해질 수도, 흐릿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안에서 이 점들을 이어 줄 수 있는 점선들이 생겨날 것이고
수많은 점선들 중에 특화된 나만의 장점들은 짙어진 선으로, 특별한 색을 가진 선으로
연결되어 자신만의 육각형인간상을 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은 생각의 전환으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것이 사는 즐거움이자 행복이지 않을까.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을 긍정적인으로 질투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면 나 자신을 잃기 십상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희망고문하는 것보다
나 만의 색깔을 가진 육각형인간의 항목들로 기준을 바꾸어 하루하루를 즐겨 보자.
그 안에서 얻어지는 성취와 행복감은 오늘보다 좀 더 나아진 내일의 육각형 인재상으로 나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육각형인간이 될 상이로다.
사진출처: 구글 123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