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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tor navorski Aug 02. 2021

우리의 낭만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말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난다.

 

집에 돌아가는 길, 평소처럼 바닥에 시선을 두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닥이 눈에 띄었다. 초여름의 강한 햇살이 울창한 가로수 잎 사이로 부서지는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반짝이는 바닥을 보며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 가로수를 바라보니 살랑 살랑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살랑 부는 바람에 내 머리칼이 흔들렸다. 다시 살랑 부는 바람에 땀이 흐르던 목 뒤가 시원해졌다.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눈으로 머리카락으로 목 뒤로 느끼며 눈 부신 햇살에 눈을 찡그린 채 가만히 목을 꺾고 서있었다. 문득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살아있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있어서 반짝이는 길을 보고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불어오는 바람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오늘 갑자기 사고로 죽게되어도 큰 아쉬움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바래 온 것은 많았지만, 이뤄낸 것을 적었다. 성인이 되고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 수록 바래온 많은 것들을 이룰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깨달았다. 목표하던 일들을 하나 둘 포기하고 마음에서 지워가며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어지자 이제는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없는 삶을 살진 않았지만 희망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희망이 없는 삶에서는 후회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희망도 후회도 없이 그저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밤이 되면 눈이 감겨 잠을 잤고, 배가고프면 밥을 먹었고, 아침에는 눈이 떠져 일어났다. 


그런데 평소와 같은 하루의 끝자락에서, 매일 걷던 길위에서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보도블럭을 보면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가로수 소리를 들으면서 속삭였다.

 

“행복하다“


그 날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말라”는 드라마 속 대사가 떠올랐다. 그 순간 내가 사는 이유는 아름다움이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없이,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던 평범한 날들 중 하루의 끝자락에서 문득 아름다운 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아름다움은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살이었고, 초록빛 새 잎사귀를 만들어낸 가로수였다. 무더운 날 땀을 살짝 말리고 지나가는 산들바람이었고, 바람에 나뭇잎이 사락사락 흔들리는 소리였다. 그 뒤로도 종종 같은 기분이 들때마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핸드폰 메모장에 글자로 남겼다. 


빗물에 촉촉해진 공기와 우산에 떨어지는 빗물소리, 친구들과 숨막히게 웃는 순간과 가족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면 함께하는 식사 시간, 강아지가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다가와 내 품에 안기는 순간, 느긋하게 자고 일어난 아침, 몸을 감싸는 포근한 이불과 이불 밖에 빠져나온 얼굴에 적당히 느껴지는 한기, 그리고 마음을 웅장하게 만들어주는 드라마의 끝을 마주했을 때. 거세게 치는 파도가 새하얗게 부서지는 모습과 세상의 소음을 잡아먹는 거센 바람소리, 아스팔트 위로 생긴 아지랑이까지.


핸드폰 메모장에 글로 적은 순간들이 늘어가도 여전히 내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하루의 대부분 노동을 하며 보냈고, 나는 그 대가로 돈을 벌어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반복되는 하루를 사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하루에 희망을 잃어가던 나는 이제 반복되는 하루에서 안정을 느꼈다. 안정적인 생활이 주는 마음의 여유로 나는 아름다운 순간을 더 많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받아드릴 수 있었다. 나는 일상을 반복할 이유가 생겼다. 아름다운 순간을 온전히 더 많이 즐기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내년에도 나는 죽는 것이 두려워졌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말라"고 말하던 드라마 속 인물은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난다."고 말한다. 낭만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성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이지만, 사는 이유를 아는 이들의 낭만은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객관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과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자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안다.


낭만을 아는 이들은 종종 남들과는 조금 다른, 평범하다고 일컫는 길과는 조금 다른 선택으로 사람들의 눈에 띈다. 집을 팔고 세계여행을 떠나거나,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학을 그만두거나, 일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소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더라도 각자의 낭만을 이어가는 이들도 존재한다. 눈에띄는 이들로 인해 낭만적인 인생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며 상식을 뛰어넘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나, 무서움을 모르는 청춘의 전유물처럼 여겨지지만 평범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하루하루에서도 낭만은 존재한다. 


웃는 얼굴로 오늘도 안전하고 배부르며 풍족한 하루를 보낼 아이를 위해 몸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출근을 서두르는 한 사람도, 아이와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재정적인 안정을 포기하고 휴직을 선택하는 이도, 부모님의 뿌듯함과 평안한 노후를 위해 불확실한 꿈을 포기하고 취업을 서두르는 학생도, 자신의 오랜 꿈을 위해 부모의 눈총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는 이들도 모두 각자의 낭만이 있다. 


사는 이유가 누구나 화려한 성공과 위대한 업적일수는 없다. 누군가의 사는 이유는 평범함이라는 이름에 숨어있을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사는 이유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라는 말에 갇혀있을 수도 있다. 오늘 하루도 눈을 뜨고 움직이고 살아 숨쉬어야 할 이유를 아는 이들의 모든 하루하루에는 낭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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