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관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늘 고리타분한 사랑만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당신에게 빠져 이리도 무수한 새벽을 울며 지새우게 되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사랑의 시작이었다. 애초에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다는 지인들의 말에 싱겁게 웃어 보이고 씁쓸한 속내를 삼킨다. 목울대 너머로 넘어간 단어들이 잊히지 않는다. 당신을 잊겠단 다짐도 자꾸만 까먹어서 눈길을 돌린다. 자연스레 당신의 뒤통수를 향해 나의 시선이 박힌다. 당신은 한 번쯤 돌아볼 법도 한데 한사코 그럴 리 없다. 단념을 다짐한 후로는 상당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펜을 붙잡고서 엉엉 끅끅 시끄러운 소음을 일으키며 한바탕 울어젖혔다.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난 울어도 소리 없이 우는 쪽에 가까웠다. 한데 그날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었더란다. 방안엔 오직 나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온통 물기가 어려 하마터면 곰팡이가 필 지경이었다고, 시시한 농담을 건네보고 싶다. 그래 놓고서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을 먼지같이 훌훌 털어버린 뒤 일어나고 싶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는가요.
“키는 작고 귀염 상인 사람이래.”
당신이 이제 누구와 행복하고 미래를 가꾸어나갈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토록 확연한 현실을 모른체하고파지는 심정을 어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이라면 이런 나를 잘 어르고 타일러서 지워낼 수 있다며 힘을 북돋아 줄 것도 같다. 되려 그 다정함이 더 슬퍼질 테지만. 밥도 넘어가지를 않는다. 먹어도 먹는 게 아니고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 해서 죄다 살아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내가 숨을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다. 피로하다. 하루 종일 당신을 궁금해하는 데에 온 에너지를 허비한 탓에 피곤을 달고 다닌다. 당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 당신의 취향과 식성. 지인과 가족들. 취미와 습관, 버릇, 아주아주 사소한 면들까지도 빼곡히 전부 다 알고픈 심보이다. 하지만 내겐 그러한 자격이 쥐어지지를 않으니까,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서 당신에 관한 온갖 추측들과 망상만이 난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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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가 준 초콜릿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는 알 턱이 없다. 먼저 다가와 은근슬쩍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당신은 거기까지 친절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당신이 좋다. 좋지만 좋아하지 않을 예정이다. 새로운 사람도 만났다. 당신과는 달리 과분한 애정을 선사해 주는 사람이다. 이젠 이런 사람을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 사람들 말마따나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걸 몸소 경험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미 경험은 해보았다. 당신도 그중 하나의 예시가 된다. 당신을 통해 전에 좋아했던 이를 잊었다. 만일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아직까지 그 사람에게 옴짝달싹 못하는 인간이었으리라. 갈증이 났다. 당신이 아침마다 왼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서 출근한다는 사실을 누구누구 알고 있으려나, 새삼 질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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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로 손톱을 길렀네?”
손톱을 길렀다. 원체 바짝 자르는 타입이어서 제때제때 잘라주는 편인데 이번엔 손바닥을 보일 시 덩달아 손톱도 빼꼼 고개를 내밀 정도로 길렀다. 귀찮아서 그랬다. 당신을 포기해가며 세상만사 지루하고 따분하다. 재미없다. 손톱을 자를 기력도 없다. 멍 때리는 시간이 늘었다. 사실상 당신을 떠올리는 시간이다. 아울러 잠을 자는 시간도 늘었다. 깨어있는 시간이 괴로워 차라리 잠을 자는 편이 나았다. 내리는 빗줄기를 가만 응시할 때면 나가서 흠뻑 젖고 오고 싶다. 불을 보면 뛰어드는 불나방인 양 당신을 볼 경우 뛰어들고 싶다. 달려가 대뜸 안아버리고 싶다. 소나기인 줄 알았던 사랑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긴 장마이다. 다시 병원을 다닌다. 잘라야 하는 건 손톱이 아닌 짙어진 감정일 수도 있겠다.
일주일 전. 당신 꿈을 꾸었다.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며 활짝 웃는 꿈이었다. 단번에 꿈인 걸 알아챘다. 당신이 내게 이리도 헤프게 웃어줄리 만무한데. 어깨동무를 한 채 당신과 다정히 사진을 찍은 뒤 뒤편에서 울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눈물에 젖어 무거워진 눈을 뜬다.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단정한 당신의 옷차림새와 깔끔하게 넘어간 머리카락을 매만져주고프다. 잊을 거라면, 정말로 잊을 거라면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노릇이다. 당신에 대해 더욱 상세히 적어나갈 수가 없음이 원통스러울 따름이다. 청춘의 색을 잃었다. 그렇지만 인제 진짜 나아가야 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한발 한발 움직여야 했다. 당신에게 초콜릿을 전해주러 갔던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해야 했다. 아라 씨와 나누었던 지난날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좋아하기만 하는 건데 왜 안 되어요. 너무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요. 내가 그 사람과 이상의 무엇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이 쓰던 젓가락을 훔쳐 와서 간직하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그 사람이 버린 무언가를 다시 주워오는 것도 아닌데.”
“그건 범죄 아닌가요.”
“그러니까요.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안 되냔 말이죠. 단순히 그냥 좋아하는 건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한 것도 아니고.”
내 손을 움켜쥐던 아라 씨의 체온이 되살아났다.
시나브로 봄이 온다. 죽어있던 것들이 생명력을 되찾는 계절이 온다. 정황상 모든 것들이 우리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나는 너무 오래도록 기척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