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

by 주또

[진짜 예전엔 화나서 머리 털 다 뽑아버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몹시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면 이건 이상하지 않은 걸까요?]

[얘기만 들었을 땐 좀 이상한데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가요. 인생은 역시 너무 어렵다.]

[그럼 그냥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야지.]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버리라던, 이옥섭 감독의 말을 접한 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만일 너무 사랑했으나 너무 미워져버린 상대라 하면은? 더 사랑하지 못해서 그랬나? 내가 덜 사랑하여 미움이라는 결과를 초래해버린 걸까? 내 사랑이 부족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를 잊게 된 건 내가 얼마나 그에게 하찮은 존재였는지 실감했던 시기였던 거 같다. 사람들 말에 따라 내가 그에게 보였던 온갖 진심은 그저 헛수고에 불과해질 수 있겠구나 했다. 그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물론 그에게 알아달란 심보로 행한 전부는 아니었다만 그래도 속이 상했다. 비참했다. 그래서 그를 잊었다. 그를 향한 사랑과 환상 그 어디쯤을 내려놓고서 내 갈 길을 가고자 했다. 그가 미웠다는 얘기이다. 한솔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었다.


[솔아, 죽이고 싶은 것도 사랑일까?]

한 5분 이내 한솔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그런 게 애증 아닐까?]

애증. 그럴 수도 있겠다.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인터넷 검색창에 애증을 입력했다. 이어서 뜻을 읽었다. 사랑과 미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허공을 응시하며 그 의미를 오래도록 곱씹었다. 쓴맛이 났다. 분명 당신을 처음 음미할 땐 단맛이 가득했는데 인제 매캐한 향과 동시에 쓰디쓴 맛만이 감돌았다. 입맛을 버렸다. 뭘 먹어도 맛이 없던 시절. 난 줄곧 하나에 빠지면 목매었다. 끈질기게 좋아했다. 한 연예인을 5년 이상 좋아했고, 대학생활 동안 전공 특성답게 창작물을 만들어내야 할 때마다 그와 관련된 작업물을 제작하여 과 교수님들이 전부 내가 그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음식도 그랬다. 뭐 하나 입맛에 맞으면 한 달 내내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소시지가 좋아서 한 달 내내 밥과 소시지만 먹은 적도 있고 옥수수빵에 빠져 세 달 내내 그 빵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기도 했다. 사랑에도 마찬가지였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무려 7년 동안 쩔쩔맸다. 그가 부르면 달려가고 그가 멈추라면 멈추고 그가 가라면 갔다가 다시 왔다.


이런 식이다 보니 뭐 하나에 빠지는 게 무서웠다. 사랑도 하기 싫었다. 취향에 딱 들어맞는 무언가를 마주치기 두려웠다. 그런데 그를 만났다. 잘도 운명인 줄 착각하는 나는 또다시 그에게 운명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될 줄 알았다. 염치없는 소리이다. 사실상 그와 잘 될 기미도 없었을뿐더러 잘 되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염려에 부응하여 그는 내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소매 끝으로 지우고 밀어내려 애써도 손바닥 안이었다.


*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그를 좋아하는 게 한 해를 넘어섰다. 연이어 그를 미워하는 데에 한 해를 허비했다. 사랑에서 미움으로 뒤바뀐 순간 내심 흡족하기도 했다. 이제 그가 어디를 가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나를 예뻐하든 말든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었으니까. 비로소 벗어났다. 매일같이 방안을 넘실거리던 그의 얼굴이 꼴 보기 싫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늘 내 곁에 있긴 했다. 내가 친구를 만나고 밥을 먹고 카페를 가며 웃고 떠드는 동안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보고 웃었다. 환영이었다. 그를 너무 오래도록 생각해온 탓에 잔상이 일렁이는가 싶었다. 그러다 다른 사람을 만나 그를 비웠다. 사그라든 당신이 신기루 같았다. 그와 무엇 하나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만 한 생애를 통째로 붙어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를 사랑했고 미워했다. 그러나 의미 없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와 부쩍 가까워지게 되었다. 딱히 어떠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려나. 그의 차를 타게 되었던 날이 있었다. 무척이나 오래간만이었다. 멋쩍었다.


“예전엔 그래도 많이 타곤 했었는데.”

지난날 그의 차에 탑승했던 기억.

“많이 탔던가?”

당황한 그의 음색이 들려왔다.

“꽤나 탔어요. 하나도 기억 안 나죠?”

까맣게 잊었을 듯했다. 예상한 결과였다. 그는 나에 대해 기억하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내가 멀리 있는 걸 볼 때 안경을 쓴다는 사실도 매번 까먹어 원래 안경을 썼나? 하고 묻던 그였다.


“아, 그건 기억나. 너 데려다준다고 해서 탔는데 목적지가 바로 코앞이어서 황당했던 적.”

“그때 왜 그랬었나.”

모르는체했다.

“그날은 유난히 걷기 힘들었을 수도 있지.”

아니었다.

“아니거든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거거든요.”

이 양반아.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 그는 겸연쩍게 웃었다. 나 역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나치는 차창 너머로 옛 추억을 회상했다. 홀로 외로이 쌓아왔던 추억. 그 탑은 무너지지도 않았다. 추억은 모래성과도 같다. 쉽게 부서지고 사라진다. 그게 다 신이 주신 망각이란 선물이 있어서라고 한다. 신이 진짜로 있나. 한데 왜 내 추억은 이리도 선명한가? 그와 그 후로 더 친숙해진 듯하다. 은근히 기대어오는 어깨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더불어 어떠한 게임을 함께 한 적이 있어 부딪혔던 손과 아주 잠깐 맞잡았던 찰나를 떠올린다. 감촉이 희미하다.


*

고민을 얘기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아주 깊게는 아니고 얕은 일부만을 털어놓는 것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참 고맙게도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었다. 어느 날은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지금의 난 말랑 콩떡에 흐물흐물 거리는 데다가 쿠크다스처럼 걸핏하면 부서진다고. 하니,


[쿠크다스 어렸을 때 많이 먹었는데. 너 쿠크다스 안 좋아해?]

엉뚱한 답장을 보내왔다. 그에 응해서 나는 사심 약간 섞인,

[좋아해요.]

라는 답장을 입력했었다. 주어를 뺀. 뒤이어 핸드폰이 울렸다.

[그러면 쿠크다스해. 뭐가 나빠. 말랑하고 툭하면 부러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 많듯이 널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을 텐데. 부드럽고 부서지기 쉬우면 어때. 맛만 좋으면 되지.]

아, 나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리광 부리고 싶어졌다. 그가 나에 대한 칭찬도 해주었다. 난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어서 진짜 내 모습이 탄로 날까 걱정되었다. 이후로 종종 그에게 고민을 내비쳤다. 그는 네가 좋으면 좋은 거라는 말을 거듭했다. 타인 눈치를 상당히 보는 내게 최고의 위로였다.


“네가 좋으면 좋은 거지.”

혼잣말을 밥 먹듯 하게 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를 아직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다른 이가 생겼다. 그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의 인물이었다. 다만 공통된 점은 짝사랑이라는 점. 둘 다 가망 없다는 점.


그가 계속해서 내 옆에서 인생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생각을 하고서도 부질없어 스스로를 향한 비소를 날렸다.


*

목요일엔 상아를 만나 울었다. 노래방에서 상아의 노래를 잠자코 듣고 있던 도중 가사가 나를 뜻하는 듯하여 울었다. 봇물터지듯 오열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흐느꼈다. 울고 싶지 않은데, 더더욱 다른 이가 보는 앞에서는. 흐어어엉, 상아가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며 연신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괜찮지 않았다. 그럴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더 나빠질 일만 남았을 거야.


“이상한 건가?”

상아는 늘 정해진 답을 시행하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상한 거 아니야.”

가늘고 긴 손가락이 서둘러 나의 눈가에 닿았다. 애정 어린 손길에 결핍이 들통났다. 도무지 울음을 그칠 방도가 없었다.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 죽도록 미운 경지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재평가된다. 다르게 보인다. 고맙다. 고마워서 괴로워졌다. 정신이 혼란스러워 차라리 미운 편이 나을 것 같단 생각을 한다. 한사코 고마워서는 안되었다. 상황은 달라졌으나 그는 여전히 내게 먼 존재인 건 분명했다. 나만 놓으면 끝날 관계였다. 정마저 들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니까 즉, 거듭 응석 부리고 싶고 대화하고 싶어져서는 안된단 뜻이다. 상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의미가 있어?”

그와 나누는 대화에. 내가 받는 위로에.

“없어.”

칼을 쥐고서 아프다고 울면 어떡해. 놓을 줄도 알아야지, 주영아.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잘못 잠갔다. 술을 원체 입에 대지 않던 내가 요 며칠간 술 생각만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술에 취하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을 듯했다. 그를 미워하기 전으로 혹은 그를 미워하던 때로. 그리하여 지금 이렇게 고마울 일도, 의지하고 싶어질 일도, 난잡할 일도 없던 날들로.


내가 바라는 무탈한 일상.


[안 좋았던 거는 과거고,]

[요즘 친해지고 위로받아서 좋다는 거잖아.]

[분명 네가 고민하는데도 이유가 있겠지.]

[근데 지금 이야기만 들으면 좋은 관계가 된 건데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관계?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내게 무해한 적이 없었다.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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