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공병에 나눠 담으려 하는데 자꾸만 주변으로 다 새어나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금세 축축해진 손. 바지춤에 대충 쓱 닦아버리고는 마저 공병을 채우고자 자세를 고쳐잡았다. 비누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한 2년 전부터 줄곧 비누 향 향수만 고집해오는 중이었다. 친구를 통해 선물 받은 것이기도 했고 좋아했던 이가 나의 향을 기억하고 있었던 탓에 바꾸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날은 좋아했던 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주말에 핸드크림을 사러 갔는데 그곳에서 너 향수 향과 비슷한 냄새의 핸드크림을 발견했었어. 네 생각이 났다.”
그 뒤로 나는 향이 가진 힘을 더더욱 굳게 믿게 되었고 절대로 절대로 이 향수 아닌 다른 향은 손도 대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좋아했던 이는 좋아했던 이로 남았고 그가 내 향을 여전히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다. 비누 향을 사용하던 내가 그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미끈거렸을지를 도무지 알 턱이 없다. 거의 0번에 가까우려나.
향을 바꾸기로 결심하고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깡그리 바닥내기 위해 열심히 뿌리고 있다. 이것을 끝으로 그가 기억하는 내 향은 과거로 남을 것이다. 다 채워진 공병을 보며 흡족해했다. 12월 19일엔 글 얘기를 시작한 이에게 향수에 관한 일화를 듣게 되었다. 내용은 이랬다.
[내가 처음 쓴 향수는 폴스미스 스토리인데 약간 우디 시트러스 이런 느낌인데 근데 단종되어버린 거야 계속 쓰고 싶은데 좋아하는 애한테 받았던 건데 암튼 그랬다.]
이 대화가 왜 이리 여운이 남는지, 하루에 두세 번 이상은 꼭 떠올랐다. 좋아하는 상대가 준 향수를 계속해서 쓰고픈 귀여운 마음과 더 이상 그 향수를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안타까움 때문이라 하면 될까.
나는 좋아하는 이에게 향수를 선물 받아본 적은 없다만 첫사랑에게서 났던 담배 냄새를 잊지 못했다. 그 사람으로 인해 길을 가다 담배 냄새만 날 경우 뒤를 돌아보고 두 눈이 벌겋게 물들어 걸음을 멈췄었다. 심지어는 한때 함께 일했던 사람이 심각한 골초였는데 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들어올 때마다 옛 기억이 물씬 풍겨 눈물을 몰래 훔치는 청승까지 떨었단다.
모쪼록 향이 주는 추억은 대단했다. 사람에게서 나는 향과 더불어 자연에서 나는 향 또한 먼지 쌓인 기억을 털어내기에 적합했다. 비온 뒤 다음 날 아침엔 어릴 적 살던 눅눅한 1층 집 방안이 연상되었고 찬 바람이 부는 새벽 공기엔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맥모닝을 먹겠다고 밤을 꼴딱 새운 후 교복을 입고서 맥도날드로 달려갔던 장면이 나풀거렸다. 이 외에도 불현듯 마신 공기와 냄새에 종종 지난 추억을 상기시키고 그 추억이 좋았거나 나빴거나 구별 없이 나를 자주 멈칫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기억을 불러오는 요인 중 계절도 포함이었다. 사계절마다 떠오르는 각기 다른 인물이 있었다. 아 봄은 제외다. 봄에는 아직 인상 깊었던 이가 없다. 여름에는 첫사랑이 대표적으로 떠올랐다. 다음으로는 앞서 말했던 향을 기억하던 사람. 두 사람 각자 반했던 시기가 모두 여름이었다. 햇볕에 붉게 익은 얼굴로 수줍은 얼굴을 잘도 감췄더란다. 땀인지 눈물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을 투명한 것들을 연신 쏟아냈더란다. 이로써 사랑이 제철인 여름. 오죽하면 사랑은 여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반드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가을에는 단절된 친구 리. 나의 어리석음으로 떠나보낸 이 아이를 여태 놓아주지 못하고 떠올려냈다. 미안해. 날이 쌀쌀해질 무렵에는 으레 안부와 사과를 속으로 동시에 건넸다.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헤드셋을 낀 네가 묵언하며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겨울에는 본래 전에 짧게 만난 어린 연인이었으나 최근에 바뀌었다. 다가서기 어렵고 눈빛이 매력적인 사람이 차지했다. 아침에 눈 떠서 눈 감는 찰나까지 그 눈빛이 아른거려 쉬이 잊히지 않는다. 속절없이 일상을 함께 보내야 하는 꼴이 되었다. 앞으로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때까지 이 지경이라 하면은 새로 오는 봄에도 이 사람이 추가될 테지.
이토록 은연중 마주할 수 있는 향과 계절로부터 담담해질 수 있도록 긴장해야 한다. 추억은 대개 나를 들뜨게 만들기보단 주저앉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란 보장이 없는 까닭이려나. 계절은 계절대로 슬픈 일을 데려와 앉혔다. 향은 향대로 시린 눈을 짓게 하였다. 여러 사람들에게 향수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했다.
*
어떻게 해야 좀 더 영리한 방법으로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당신에게 대 놓고서 마음을 표현할 경우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고 불쾌감이 형성될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요. 자칫 잘못해서 당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택했어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어요. 요동치는 맥박이 귓가로 흘러와 이러다 이명이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니려나 걱정했어요.
당신을 마주하고 온 5분을 하루처럼 살았어요. 일주일 동안 곱씹고 이 주일 동안 되감고 한 달은 날 보듯 당신을 보았어요. 정말 거짓말 같게도 당신이 허공에 펼쳐지는 날이 많았어요. 그러면 살포시 미소 짓고서 정신 차려야지 하며 고개를 휘휘 젓고 그랬어요. 무한 굴레였어요. 이제 떠나 이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없어요. 이로써 또 한 번 사랑을 알아요. 혼자선 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요.
당신의 친절한 음성이 자꾸자꾸 떠올라요. 어렴풋 웃던 모양새가, 웃음소리가, 날 갖고서 장난을 쳐요. 당신은 내가 어떤 말을 하든 관심 없을 거예요. 어떤 마음과 자세로 당신에게 임했는지 짐작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 가는 길에 내가 일절 스치지 못할 테지요. 기억에도 향이 있어요. 맡아본 적 없는 향을 알 것도 같아요. 그 향이 풍겨와,
미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