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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n 06. 2023

파이팅

북적이는 소리들 가운데 정작 내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멀어진 시간만큼 기억마저 퇴색되어버릴까 봐 막막하다. 가능한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픈 심정에 거듭해서 지나간 장면들을 되풀이한다. 그로 인해 매일 같은 꿈을 꾸게 되는 건 부작용이다. 깨어나 보고 싶어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면 물기가 묻어난다. 일어나서 하루를 또 살아가야 한다. 즐겁지가 않다. 무엇을 행하든 간에 시시하고 따분할 따름이다. 물을 마시고 어기적 거실을 돌아다니다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다. 누군가에겐 말하지 않았다만 혼자 있을 땐 공허한 표정이 다반사다. 한마디로 동태 눈깔이다. 웃음기 싹 빠진 얼굴. 나라 잃었냐,는 농담에 그럴 수도 있겠다 속으로 대꾸한다.


잊고자 하나 막상 잊게 된다면 아주아주 소중한 걸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휩싸일 것 같다. 파이팅이란 말도 효력이 없다. 곁에서 두 눈 마주한 채 하는 격려가 아닐 경우 그냥 내가 그려내는 허상 같을 뿐이다. 누군가만 있어준다면야 기꺼이 감내하고자 했던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용하다. 몽땅 누군가 한정이었다. 상아에게 이런 걸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댈 시엔 또 답답한 소리하고 있다며 나무랄게 분명했다. 최대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서 비밀리에 홀로 감당한다. 솔직히 상실감이라는 거 별거 아닐 줄 알았다. 이리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주범이 될 거라고 감히 예상 못 했다. 아니 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계속해서 외면하고 싶다.


그간 써왔던 글들을 차례대로 나열했다. 그러면서 한번 대충 쓱 전체적으로 훑어보았는데 정말이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 있던 지훈 과장님에게 물었다.


“제 글 왜 이렇게 다 슬프죠? 슬픈 글만 썼네 나.”

과장님은 흡사 디지몬 어드벤처에 나오는 파닥몬처럼 해맑은 표정을 한 상태로 대꾸했다.

“글을 점심에 쓰도록 해봐.”

음.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떠있을 적에도 자주 쓰곤 했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지훈 과장님은 내가 인스타그램 맞팔로우를 하고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회사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과장님하고는 카메라를 구매하면서 친해졌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만 대략 한 육 개월 전인가. 과장님이 사용하던 중고 카메라를 샀다. 후지필름 x100f. 굉장히 싼 가격에 넘어왔다. 그 계기로 사진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고 어쩌다 보니 그림에 대해서, 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과장님도 한때 취미 삼아 글을 적던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일기 형식으로 쓰였던 그의 글들을 받아 읽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간혹 툭툭 내뱉어주는 말들이 내게 영감이 되기도 했다. 그를 칭하자면, 다정한 사람. 이런 표현은 다소 부끄럽다만 그는 미열을 앓는 이마 위에 얹어진 따스한 손바닥 같기도 했다. 오래 알고 싶은 사람은 굳이 찾지 않아도 얼떨결에 만나게 되는 법이라 했다. 과연 그는 애쓰지 않아도 길게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일까, 5월 12일 그가 준 피스타치오 크림빵을 먹으며 생각했다.


*

잘 지내보겠단 다짐은 매번 원점으로 돌아가 나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웬만한 상황에 있어서는 운명이 아녔던 거지, 하고 만다. 하나 사람에 있어서는 운명일 수는 없나? 꼭 물음표를 붙이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심 팔자에 없는 해피엔딩을 꿈꾸는 것도 같다.


사주를 보러 간 곳에서 무료로 이름 풀이도 해주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내 이름은 내 복을 깎아먹는다고 했다. 원래도 흔해 빠진 이름인지라 애정을 갖진 않았다만 인생을 꼬이게 만든다 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렇다고 해서 개명을 할 건 또 아녔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거니 했다. 평소 개명을 생각하면 이사랑이라든가 이조아라든가 마음 표현이 들어간 듯한 이름을 선망했다.


만일 사랑일 경우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아,라고 불린다면 애틋한 느낌을 받을 것 같았고 조아, 또한 좋아서 좋았다. 그러나 딱히 개명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건 아니니 타고난 복을 깎아먹는다 하여도 어쩌나. 주영이란 이름과 평생을 붙어먹을 작정이다. 게다가 이미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연 날 주영으로 알고 있기에 가끔은 그들이 불러주는 내 이름이 의미를 가져 만족스러울 때도 종종 있다. 오타 남발하는 중영이든 별명 줭이든 자주자주 불리고픈 욕심도 생긴다.


[파이팅!]

[중영.]


*

노를 젓지 않는다고 해서 가라앉지는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뿐이다. 방향성을 잃은 현재. 발등에 불 떨어진 듯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정체되어 있어도 괜찮다. 빽빽함에 숨 막혀 하기보단 틈을 내어주며 여유를 부릴 줄도 알자. 내내 긴장상태로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생각이라도 느슨히 잡으려 애썼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지도 한 장 쥐어지지 않은 모험을 떠나는 심경이다.


*

애인이 허심탄회한 얘기를 늘여놓다가, 무심코 핸드폰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넌 잠재성 많은 아이 같아. 그래서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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