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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n 10. 2023

Z

어쩌면 내가 안정적인 거에 흥미를 길게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이에게 그릭 요거트를 사주지 못해 내내 마음에 걸리는 아쉬움이 있고 괜한 객기를 부리고픈 날엔 피우지 않는 담배를 그냥 한번 구매나 해볼까, 싶어 동네 편의점 주변을 한 삼십분가량 배회한다. 그러나 그걸로 끝. 별다른 수확 없이 집으로 털레털레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아무런 용기가 없었다. 무언가를 시작할 용기와 혼이 나지 않을 듯한 꿈속에서 연신 잘못을 고하는 것 외에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자신이 없었다.


근래에는 다시금 독서를 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나 한 문장을 읽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저번달에 읽었던 책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마음이 적잖게 동요하여 밑줄을 여러 번 그어두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책 틈 사이에 끼워두었던가? 동생이 주었던 책갈피가 행방불명이다.


매일 아침 회사에서 습관처럼 우려먹던 단호박 팥 차가 동났다. 하지만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하여 구매 버튼을 누르는 일은 없었다. 만사가 대충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줄곧 이 상태인 건 아니다. 희한하리만치 기복이 심했다. 하루 단위로 잘 살고 싶다가 못 살고 싶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시간 단위로 그랬다. 갑자기 의욕이 넘치더니 불과 한 시간 만에 짜게 식었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다 떠나간다 하니까 그게 급급해 발등에 불 떨어진 양 허둥거리는 거다. 실은 내 인생을 잘 설계해 보고픈 욕심도 적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지금 정도로 만족한다. 다만 누군가 내게 십 년 뒤 너의 모습이 궁금하다 했을 때 난 조금 더 잘 살아야겠다 다짐했을 뿐이었다. 단지 십 년 뒤 마주했을 시 부끄럽고 싶지 않단 결심 하나로. 근데 또 잘 모르겠다. 다 잊으면 어떻게 살든 간에 낯짝이 달궈지지 않을 수 있는 거겠다.


2018년에 출간한 책은 여전히 매달 꾸준히 팔리고 있다. 적은 권수이다만 판매 보고서를 받는 시기마다 대표님과 난 의아해했다. 대체 왜 죽지 않지? 뿌듯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부럽지 않다. 나는 나대로 나다운 글을 더 잘 쓰고 싶고 두 번째 책을 출간하는 날을 맞이하고 싶다. 아니 앞으로도 관뚜껑 닫는 날까지 책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난 뭘 하든 관뚜껑 닫을 때까지 어쩌고저쩌고 하겠단 말버릇이 있다. 예를 들자면 관뚜껑 닫을 때까지 간직할게요, 라든가 관뚜껑 닫을 때까지 기억할 거예요, 라든가 등등. 이런 뉘앙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게 뭐냐며 웃어버린다. 웃는 얼굴에 대고 나도 웃었다.


*

친구가 작년 생일날 보내준 화분엔 코팅된 네잎클로버가 함께 포장되어 왔었다. 난 곧장 그걸 지갑 속에 넣어두었고 그로부터 며칠 후 방안을 정리하는 도중에 구석에서 또 다른 네잎클로버 코팅물을 발견하여 그것 역시 바로 지갑행으로 쏙 집어넣었다.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부적처럼 맹신한 건 아녔다만 내심 그러지 않을까? 기대했다. 언제나 행운은 내게 멀리 있고 행복과는 절대 친해질 일 없을듯하여서.


그러던 어느 날 재식을 만났다. 녀석이 무심코 책상 위에 놓인 내 지갑을 열었다가 네잎클로버 두 개를 마주했다. 하나 달라더라. 강아지 마냥 큼지막한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아, 내 행운인데. 망설이는 척하다가 실컷 생색내며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가 가진 행운 너 하나 주는 거다.”

녀석이 여태 그걸 보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난 간혹 되는 일이 없을 때마다 재식에게 내 행운을 나눠주어 그런 거라며 의심한다.


*

열시면 잠들던 시기는 이제 완전히 지나가버린 모양이다. 이제 새벽 한시는 기본으로 지나친다. 이게 다 전에 새벽에 왔던 연락을 답장하지 못했던 일 때문이다. 자의로 밤을 보내는 건 아니다. 잠이 오지 않아서이다. 심지어는 겨우겨우 잠을 잔다 하여도 새벽에 몇 번씩 깨어난다.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핸드폰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한다. 세시. 네시. 다섯시. 일곱시. 평범하게 푹 잠을 자지 못하는 건 어릴 적부터 해왔던 것이기에 익숙하긴 하다. 근데 그게 부쩍 더 심각해졌을 뿐이지. 퍼석해진 피부를 감싸 쥔 채 앓는 소리를 낸다. 으아, 피곤하다.


출근 버스에서 이름 모를 여성분과 노인분이 다투는 걸 목격했다. 여성분은 잔뜩 열이 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내가 여기서 내리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솔직히 에어팟을 끼고 있던 탓에 앞전 상황은 모르겠다만 보통 일이 아닌 건 직감할 수 있었다. 이어서 노인분께서 무어라 중얼거리셨다. 잘 들리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여성과 한숨을 푹푹 내쉬는 노인. 버스 안엔 정적이 일었다. 벨을 눌렀다. 여성분이 내리고 나도 뒤따라 내렸다. 여성분은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전진.


사람이 화가 날 경우 뒷모습마저 화가 나보이는구나, 처음 깨달았다. 아침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맨 팔뚝을 문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

채원은 6개월 간격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연락 한통 없다가 차차 잊힐 시기가 되면 알아서 귀신 같이 나타나 약속을 잡자했다. A~Z까지 순차적으로 만나는 본인만의 사이클이 있어 그렇다 했고 난 살짝 삐친 어투로 그럼 난 Z번째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껏 당황한 채원은 그런 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 설핏 웃음지었다. 그녀는 함께 여행을 가자는 내 말에 내년을 기약했다. 심지어 내년 초가 아닌 말쯤이었다. 캘린더를 열어보라는 채원의 말에 만류했다.


“야야 채원아. 멀어. 멀어도 너무 멀어.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내년 10월? 일년이 훌쩍 넘어.”

그러자 채원은 약간 민망한듯 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그럼 내년 4월. 어때? 삿포로 가자.”

못말린다 진짜.


내년 4월 5일. 오늘을 기준으로 301일 전. 일정을 적었다.

[이채원이랑 일본 여행]


우리는 과연 삿포로에서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

나는 무엇이든 잘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다. 물건이든 주변이든 상황이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간에. 뭐든 부스러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보기 좋게 정리하고 싶다. 잘 살아야지, 하는 다짐은 가볍게 살아야지,로 수정했다.


지나고 보니 다 좋았다.

홀가분해진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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