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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Mar 29. 2023

리에게

외로우니 별 같잖은 거에도 잘 흔들린다. 가령 열 번 매정하던 상대가 한번 잘해줬다고 해서 마음이 민들레 씨 마냥 홀연히 날아가 버리기 일쑤이며 여기저기 치근덕대는 누군가가 내게는 진심 아니려나 헛된 드라마를 꿈꾸기도 한다. 더불어 다 잊었다 생각했던 고약한 성격의 사랑과 철 지난 첫사랑이 이따금 마음을 매만져 심보를 부드럽게 만들기도 한다. 여러모로 난처해지는 시기이다. 사람이 너무 외로우면 사랑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사랑하고 사랑받아 마땅하지 못한 것들에게도 감정을 쏟게 돼.


리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지난날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단단히 틀어져 버린 리와의 관계가 여전했더라면 난 지금쯤 당장 리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을 테지. 첫사랑을 만났다고. 그런데 참 희한하다고.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사랑에 의해 마음 쓰느라 뭉툭해지기 바빴었는데. 엊그제만 해도 새로운 사랑의 이전인 사랑의 난데없는 다정함 시전에 혼란스러워했는데. 오늘은 느닷없이 마주한 첫사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원래 사랑이라는 게 지난 감정 다 불러와 가며 이 추억 저 추억에 휩싸이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말 투성이었으나 더 이상 나는 리에게 전화를 걸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리는 아직 빨간 간판 아래에 있는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 한결같이 원두 냄새를 풍기며 초코송이처럼 동그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을까. 네가 현재까지 전 애인으로 인해 휘청이는지 궁금했다. 내가 너와 밝고자 저질렀던 일들이 네게 전부 가시가 되어 너를 찌르고 있을까 두려웠다. 악의는 없었으나 네게 악마가 되어버린 나의 만행이 여태 네 기억 속에 박혀있으려나. 그러려나. 너는 나를 욕하려나. 네가 문득 내 인스타그램을 염탐할지도 궁금했다. 혹시나 그걸 보고서 리가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오해하면 어쩌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솔직히 나는 못 살고 있는데. 잘못 사는 중인데. 네게 저지른 실수들로 인해 새벽 세시가 되어가는 시각까지 쉽사리 눈을 붙이지 못하는데.


리는 내가 잘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리는 내가 내내 거리를 서성인다고 상상해야 했다. 리는 나의 행복을 짐작하면 안 된다. 리는 나의 불행을 기뻐해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므로. 리. 난 네가 나만큼 약해빠진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너를 얕본 적이 없다는 소리야. 너는 나보다 강한 인간이었으나 우리는 함께 불행했잖아. 그리하여 나는 행복을 알려주고 싶었어. 비록 그게 행복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 길이란 걸 모른 채 착각했으나 난 한 번도 네게 검은 그림자를 쓴 적 없단 말이야. 이게 네가 나를 증오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네가 보고 싶어. 리, 우리의 우정은 끝난 거지.

나는 왜 믿고 싶지 않을까.


*

얼마 전에는 내가 어떤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 본의 아니게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뭐든 간 상처라면 본의 아니게라는 말이 허용되지 안 되는 거잖아. 어찌 되었든 내가 고운 마음에 생채기를 낸 건 맞으니까. 나 너를 잃고 난 이후로는 어떠한 것들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살아왔어. 그래서 배로 친절하고 과하게 선하려 애썼어. 그런데 모두 수포로 돌아간 거지. 출처를 모르겠는 타격감이 연달아 나를 때리고 또 때리고 그랬어.


너는 여전히 커피를 내려? 여전히 그 곱디고운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스스로에게 상처받고 그래? 사랑하던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니. 잊지 못해 벗어나지를 못하니. 있잖아. 나는 이제 그때 말하던 사람을 지워버렸어. 그냥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내가 자격 없는 사람이 된 거 같아서, 짝사랑에도 자격을 잃은 듯해서 죄다 희미하게 바꿔버렸어. 잘 살아 보겠다며 저질렀던 모든 일들을 죄처럼 어깨에 얹고 있어. 포기한 게 많다고 네게 용서를 구하듯 말하고 싶은데 제일 먼저 포기해버린 게 나 자신인지라 네게 용서 구할 내가 없네.


언젠가 한 번쯤은 네게 연락이 올지도 모를 거란 생각을 해. 꿈에서도 몇 번 그런 장면들을 꾸곤 그랬어. 난 네게 할 말이 참 많아. 네게 할 이야깃거리들로 매일을 채워 가. 사실 요 근래 기억이 잘 나지 않거든. 아니 기억은 하는데 지난 모든 일들이 두루뭉술 흩어지는 꿈처럼 느껴지고 말거든. 전부 다 내가 꾼 꿈 혹은 내가 쓴 글의 일부였던가 싶어지고 말거든. 그래도 네게 전부 다 말해주고 싶어. 하나도 빠짐없이 나 이런 일이 있었다? 나 이랬어 말하며 우리 또 노래방에서 흐느끼던 것처럼 흐느끼고 싶어. 너와 흥얼거리던 검정치마의 노래들, 나 그거 이제 잘 못 들어.


넌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알 수 없는 네가 무섭고 이대로 알 수 있던 너마저 내게서 더욱 멀어질까 봐, 다른 기억들처럼 흐려지고 빛바래질까 봐 두려워. 이제 나 좀 봐줬으면 좋겠어. 밖에는 비가 온대. 네가 이 글을 읽는 날이 오려나. 헤드폰을 끼며 책장을 넘기고 있을 네가 간절해. 비록 우리의 인연은 한참 전에 끝났다지만 난 아직 끝이라는 표현을 못 써. 무지 많이 미안해. 리야. 네가 그리워.


*

네가 짓던 웃음. 그 예쁜 미소를 난.


내년이 오면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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