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광

by 주또

그와 단절되려 했으나 잘 되지를 않았다. 그를 끊어내야 하는 게 옳은 거였다. 물론 그는 내게 공급 없이 기대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만 내 마음 자체가 잘못인지라 괜한 자질구레한 것에 의미 부여를 난 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볼 경우 슬펐다. 슬퍼서 울고 싶었다. 가질 수 없어서 슬펐고 그럼에도 그와 자꾸 놀고 싶어져서 슬펐다. 게다가 훗날 그를 아예 보지 못하게 될 날들이 언제 올까 두려워 슬펐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언제든 할 수 있었다. 온다고만 해준다면야 5년이고 10년이고 망부석처럼 어디 안 가고서 마냥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슬프다가. 그냥 허구한 날 슬프다가 말아야 했다.


마음을 접는 건 꽤나 어려웠다. 가능한 비행기 모양으로 접어 아주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힘껏 내던지고 싶었다. 그는 왜 나를 이다지도 무력하게 만드는 걸까? 힘없는 내 사랑이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을 테지만. 난 여기 숨 쉬고 있었다. 아가미를 잃은 금붕어인 양 가까스로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가 가끔 던져주는 자상함을 잘도 받아먹으며 말이다.


“너 지금 핸드폰 번호 뭐야.”

“갑자기 번호는 왜?”

“네 첫사랑 번호 따라 한 거였잖아. 너 잊어버렸지.”

“헐.”

“거봐. 그때도 곧 죽을 사람처럼 힘들어했는데 결국 이렇게 잊었잖아. 그 사람도 이런 날이 와.”

그러니까 더 노력해. 연락처를 눌렀다. 아래쪽으로 한참 내려가니 첫사랑의 이름이 나왔다. 서둘러 눌렀다. 번호를 읽었다. 그랬네. 내가 그랬었구나. 가운데 번호가 거의 일치했다. 단 하나의 숫자만 달랐다. 소오르음. 몸을 흠칫 떨었다. 스스로에게 놀랐다. 이런 짓까지 벌인 스스로가 대단하다 해야 할지 미치광이 같다 해야 할지. 웃다가 만 표정으로 핸드폰을 뒤집어엎었다. 상아의 말이 백번 옳았다. 무엇이든지 잊히는 때는 온다. 다만 그 감정의 유통기한이 언제가 될지 몰라 이리도 팔짝 뛰고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늘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벌여놓고 보는 거다.


머잖아 보지 못할 그가 벌써 그리웠다. 두 팔을 포개어 옆얼굴을 가져다 댔다. 심장 부근이 저릿했다.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았다. 이번엔 이 사람으로 마침내 당신을 다 지웠단 소식을 써 내려가 고프다. 꿈을 꿔도 슬프고 무서운 꿈만 꾼다. 아파도 제대로 병원 진료를 받지 않고서 약만 타와 먹는다. 산다는 건 버티는 거라는 말. 성실한 무기징역수가 되어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일.


[어리광 피우지 마.]

어리숙한 마음을 무슨 수로 달래야 좋을까. 내가 성숙한 인간이 되고자 했던 건 그와 걸맞은 인간이 되고자 했던 마음에. 난 아직 자주 운다. 아니, 어쩌면 전보다도 더 많이 운다. 그가 좋아서 그가 가진 것들이 밉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서러웠다. 대충 얼버무렸다.


[슬퍼서요.]

왜 슬픈지 설명할 수 없는 처지가 딱했다.

나의 슬픔엔 명확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분명 당신과 이루어질 수 없음이었는데.


*

나는 쉽게 잊힐 인간. 그는 내가 하는 말 열 가지 중 단 한 가지 기억한다면 다행이었다. 그는 언제든 나를 버릴 수 있었다. 반면 난 언제고 그를 놓지 못해 쩔쩔맸다. 원래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더 아름답다 했던가?


“도대체 어떤 사랑을 했길래 이런 글을 쓰는 거예요?”

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울리는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내게 이유랄 건 당신뿐이었다. 그의 이름 석 자를 가득 입력하려다가 관뒀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기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알게 될까 노심초사했다. 어느덧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잠꼬대마저 조심해야 했다.


*

최대한 몸을 혹사시켜야 했다. 그래야 잠시나마 분주한 머릿속을 나 몰라라 할 수 있었다. 잇따라 떠도는 그의 생각을 잠재울 수 있었다. 내가 나를 따돌렸다. 그럴 때 간신히 호흡이 안정을 되찾았다. 줄기차게 약속을 잡았다. 새 옷을 샀다. 소용이 있나 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선 제목 모를 구슬픈 음악이 흘러나왔다. 멀쩡해야 했다. 소연 팀장님과 소파에 앉아 나누었던 대화를 깊이 되새겼다.


“평범하고 싶지? 평범한 사랑하고 평범하게 일하며 평범하게 잘 살고 싶지. 그런데 있잖아. 실은 평범한 게 가장 어렵다?”

그녀의 음성에 물기가 어려있는 듯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나의 착각에 불과했을까? 연이어 등장한 다른 이로 인해 대화는 중단되었다. 조급해졌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촉박한 사람인 양 발을 동동 굴렸다. 어서 나도 괜찮은 사랑을 하고 싶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안정적인 사랑을 하다가 얼른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자리 잡고 싶었다. 전부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과거형으로 만들고자 몰두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괴로운 건 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는 알아주지 않을 거였으니 말이다.


얼굴을 아예 보지 않으면 한결 수월해지지 않을까. 상아가 말한 대로 첫사랑을 잊은 것처럼 그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무감정 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데 내가 그 얼굴 전혀 보지 않은 채 살아갈 수가 있나. 이리도 다분히 그리운 얼굴을 한사코 마주하지 않은 채 견뎌낼 수 있나.


[단단해져야 해. 지금은 죽도록 힘들지언정 그래야 네가 살아.]

연락을 삼가도록 했다. 대화방을 나갔다. 그가 주었던 이상한 배지를 치우고 에어팟 케이스에 끼웠던 키 링 도 죄다 빼서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끼니를 잘 챙겨 먹었다. 영양제도 섭취했다. 드라마를 보고 책도 읽었다. 꽤나 다양한 인물들과 만남을 가졌다. 날 좋아한단 이를 잠깐 만나보기도 하고 새로운 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앉으나 서나 핑 도는 시야를 가까스로 똑바로 보고자 했다. 울다가도 아무렇잖게 툭툭 털고 일어나 호탕하게 웃었다.


“가끔 주영이가 웃을 때 진짜 즐거워서 웃는 건지 모르겠어. 억지로 웃는 것 같고 헷갈려.”

나만 정상이면 모든 게 정상인 거였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척 흉내를 내면 되는 거였다. 종종 뒤에서 남몰래 넋을 놓았다. 빈틈을 타 정신을 다른 세상에 두었다.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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