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by 주또

엉망인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몰라 막막하다. 뭐라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회사 책상이나 치웠다. 모니터 받침대 위에 너저분하게 올라가 있던 마리모와 자그마한 짱구 캐릭터 오뚝이들, 바이레도 핸드크림, 립밤, 위약 등 절반은 가방 속으로 절반은 책상 서랍 속으로 욱여넣었다. 한층 깨끗해진 모양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속은 난장판이었다.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또 잠이나 자고픈 심정이었다. 이렇게 어리광이 늘어난다.


수진이 나를 역까지 데려다줬다. 수진의 자전거 뒤에 앉아 웅얼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너랑 헤어지게 되어도 내가 잘 할 수 있겠지?”

수진은 어디를 가게 되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더불어 똑 부러지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며 걱정 어린 말투로 나를 타일렀다. 수진의 등에 이마를 대고 싶었다. 그럴수록 수진의 허리춤을 꽉 붙들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예쁨 받을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든 간에 수진은 빛이 났다. 누차 그런 그녀가 부러웠다. 부러운 걸 부럽다 말했다. 잘 되자. 너나 나나.


하루가 시작된 아침부터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것은 아닐지, 양껏 가라앉았다. 연신 불편해지는 심사를 곱게 펴보려 노력했다. 억지로 더 활기차게 웃고 명랑한 척했다. 잇따라 불어나는 괴리감을 모른체했다. 난 어릴 적부터 늘 잘 버려지고 잘 망가뜨렸다. 이쯤 되니 현명한 인간들이 날 떠나는 건가, 싶어진다. 멀쩡한 핸드폰과 컴퓨터는 내가 사용할 시 몇 개월 가지 못해 고장 났다. 장난감도 쉽게 부러졌다. 인형도 실밥이 터져 솜이 새어 나왔다. 옷도 뜯어졌다. 자상한 인간도 나와 친해지면 나빠져 있었다. 소중해지면 안 되었고 경험을 토대로 그럴 경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떨며 입술을 잘근 물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겨우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4시 45분이었다. 다시금 주어졌던 번호 11자리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바보가 되었다. 뒤척거렸다. 배가 아팠다. 노래나 한곡 틀었다. 가사가 가슴을 후벼팠다. 새벽을 꼬박 새웠다. 어느덧 해가 떴다.


[왜 너를 탓해. 잘못한 건 다른 쪽인데. 힘내. 넌 열심히 했잖아.]

퇴근 후 덕현에게 왔던 메시지를 재차 찾아읽었다. 전부 리셋할 수 있는 버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깡그리 삭제하고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기쁠까? 만일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잘 태어나야지. 한데 그럴 방법이 있나? 태어남을 원하는 대로 결정지을 수 있나? 이번 생과는 사뭇 다른 인간으로 말이다.


문득 죽은 나의 사촌을 그려보았다. 나와 나이가 같음에도 생일이 빨라 오빠라 불렀던 사촌. 그 사촌과 자주 싸웠었다.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었기에 지금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눈이 엄청 많이 온 날 사촌의 집 앞 언덕에서 쌀 포대를 깔고 앉아 썰매를 타던 기억이 났다. 그때 밤송이를 밟아 발에 가시가 박혔었고 그 사촌의 아빠이자 나의 외삼촌인 사람이 가시를 빼줬었다. 사촌은 열네 살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난 가끔 그 사촌의 죽음이 어쩌면 내가 맞이했어야 할 불행이 그곳으로 간 것은 아니었을까, 미안해지고는 했다. 만일 사촌이 살아있었더라면 나와 같은 나이가 되어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있었을 테지. 그의 부모를 마주하게 될 시 고개가 숙여졌다. 외숙모와 외삼촌도 나를 보며 사촌이 살아있었더라면 내 나이쯤 되었을 것을, 할까 봐.


신도 좋고 예쁜 건 곁에 두고 싶어 나쁜 것들은 내버려 두고서 착한 것들 먼저 데려가는 건가. 종종 신을 이해하려 애써보는데 역부족이었다. 영락없는 슬픔과 악한 것들이 천지에 깔려있었다. 악몽에 시달렸다. 내가 꾸는 악몽을 살게 될 것 같아 두려워졌다. 이 미친 세상 속 그 무엇에게도 지지 말자고. 고장 난 카세트처럼 되뇌었다.


[지금 자면 악몽 꾼대요.]


*

딱지를 떼어냈더니 핏방울이 금세 차올랐다. 이따금 손목을 긋던 친구를 떠올렸다. 하이얀 손목에 파도치던 검붉은 핏방울과 아울러 그 위아래를 자리 잡고 있던 검붉은 나이테. 난 단 한 번도 그 손목의 자국들을 바로 보지 못했다. 찡그리고 보거나 질끈 눈을 감아버리기 대수였다. 섣불리 들여다볼 경우 자칫 그 아이 슬픔의 횟수를 세어보게 될듯하여 그랬다. 아니 사실 지겨워서 그랬다. 나도 슬픈데 얘도 슬프고 쟤도 슬프고 심지어는 내 가족들도 슬퍼서 그게 지겨워서 그랬다.


사방이 슬픔이었다. 슬픔을 가져다 팔면 벌써 부자가 되어 더는 가난하지 않을 수 있을 듯했다. 슬픔이란 감정은 쓸모가 있는 것일까. 감정에 행복과 즐거움 이런 것들만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신은 뭐 하러 이런 요란한 감정들까지 심어놓은 걸까. 어디선가 나를 구경하고 있는 신이 넌 당장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을 것 같았다.


요즘엔 태우지 않는 담배를 태워보고 싶고 입에 대지도 않는 술병을 연거푸 들이키고 싶다.


*

4월 1일 만우절이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가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재잘거려줬으면 좋겠다. 내 감정을 10분의 1만큼이라도 느껴보기를 바란다. 내일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당신을 백지인 양 잊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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