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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Nov 22. 2023

네가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 잊은 듯한 새벽에 느닷없이 꿈에 나온다. 익숙한 얼굴에 놀라 잠에서 깬다. 내가 다 비워낸다면 완벽한 타인이 되어 영영 궁금하지 않는 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단언했는데 약간은 부족했던 모양이다.


네가 일하던 연남동 카페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 검색해 보려다가 말았다. 여태 커피를 내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 기웃거리려다가 참았다. 네 번호를 지운지는 한참 되었다. 나의 실수로 인하여 우리 멀어지던 때 황급히 없앴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게 널 위한 거라 했었지만 사실상 도망갈 궁리였던 거 같다. 너와 있었던 추억을 모조리 기억하면 내가 너무 나쁜 인간이 될 테니까. 그게 얼마나 내가 모자란 인간인지 매 순간 깨닫게 해줄 테니까.


네 사진도 없다. 인스타그램 팔로우도 끊고 끊긴지 오래이다.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줄곧 나랑만 연락해왔기에 접점이 있을 법한 인물도 없어 감감무소식이다. 잘 살고 있는가,를 묻자면 매우 염치없는 일인가. 마지막으로 우리 연락하던 무렵엔 넌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네가 첨으로 실은 오래전부터 약을 받아왔다고 고백하던 날이 떠오른다. 난 그런 네게 힘이 되어주진 못할지언정 네 슬픔에 한 겹 더 얹으며 관계를 끝맺었다.


평생 미안할듯하다. 그럼에도 변명 아닌 진실을 얘기해 보자면 난 널 얕본 것도 아니며 약하다 치부하지도 않았다. 뿐더러 힘듦을 겪으면서도 앓는 소리 한번 안 하며 꾸역꾸역 버텨가는 것이 대견하다 생각했다. 한데 내가 그랬던 이유는 너와 함께 밝아지고파서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 함께 밝아질 수 있으리라 착각했다. 그리고 그 착각이 커다란 죄가 될 거란 걸 알아챈 건 이미 저질러버린 후였다.


난 후회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텅 빈 체육공원. 가로등 불빛이 죄다 꺼질 때까지 걸으며 후회한다고 엉엉 울었다. 다만 운다고 네가 돌아오는 건 아녔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갸름한 네 얼굴만 두둥실 떠올라 가슴을 후벼팠다. 절대 네게 상처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널 슬프게 만드는 인간들 패에 속하지 않으려 다짐했었는데.


너는 가끔 나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하진 않는지, 망상해본다. 네가 내가 행복한 줄 알면 어쩌나, 내가 널 다 잊은 줄 알고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한다. 난 아직 우리의 모든 걸 기억한다. 노래방에서 검정치마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글썽이던 시절이 생생하다. 어떠한 기억은 평생을 살아가게 하기도 한다. 나이테 마냥 새겨진 네 무수한 머릿속 기억들 중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을까. 가슴에 묻었다. 벌써 사 년이 넘게 흐른 얘기이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너를 안 본 사이 회사를 다녔고 퇴사를 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가 헤어졌다. 여러 가지 사건을 겪었다. 당시 너와 했던 고민들은 다 지난 옛일에 불과하다. 그것들이 지금도 날 괴롭히지는 않는다. 첫사랑에 절절매던 아이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 나누는 사랑을 알아가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배운다. 그 안에서 잘못 만난 몇몇들에게 데이기도 했으나 좋은 경험이다. 상처에서만 그치지 않는 태도를 가졌다. 머물러 있으면 고여있기 따름이니까. 비워두고 전진해야 한다. 너도 그렇게 되었으려나.


난 이제서야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다. 상황이 그랬으니까, 란 핑계는 하지 않겠다. 구차하게 굴지 않는다. 미안하고 미안하며 너의 안온한 삶을 말없이 바라겠다. 이 마음이 전해지기를 꿈꾸지도 않는다. 네가 술에 만취하여 기절까지 했던 날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 영원토록 닿는 날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아프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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