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하루 종일 핸드폰만 뒤져보다 더 이상 어떠한 콘텐츠도 나를 끌어당기지 않을 때, 문득 너무 오래 글을 등한시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몸속 dna 한 녀석이 뭐라도 좀 읽고 써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책장을 기웃거리다 눈에 띈 ‘저녁 무렵 면도하기’. 살펴보고 있노라니 아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 책 되게 읽기 쉬워. 무라카미 하루키가 썼고.’. 읽기 쉽다는 것에 반응했는지 하루키에 반응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책을 꺼내 가방에 담아냈다.
책은 쉽게 읽혔다. 한 시간 거리의 출근길에 절반이 넘는 분량을 독파했다. 내용은 대부분 하루키가 일상에서 느낀 시시껄렁한 얘기들과 자조적인 자기성찰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약간의 거짓말(새빨갛든 새하얗든 간에)을 보태 짤막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재밌는 점은 하나의 글 안에 존대와 반말이 뒤섞여서 표현된다는 점. 아마도 독자에게 의견을 구할 때 존대를 섞어 쓰는 게 아닐까요? 일본어를 몰라 본문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아무렴 어때, 꽤나 친숙하게 느껴졌다. 책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몇 가지 인상 깊었던 문장을 발췌해 봤다.
그러나 반대로 '딱히 달라지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희한하게 사람은 달라진다. (10p)
후렴이 없는 음악은 함께할 곳이 없어 그런지 묘하게 지친다. (50p)
'새삼 절감하는' 한 가지 한 가지가 모여 우리 인생의 골격을 형성해가는 것 같다. (54p)
음식이란 결국 '공기 포함인 것' 같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55p)
설령 사소한 것이라도 다수의 시점에서 실증적으로 사고한다는 건 중요하다. (94p)
인간이란 칭찬에 부응하고자 무리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187p)
래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204p)
인간은 아마 어떤 일이 생겨 갑자기 덜컥 죽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이유를 켜켜이 조금씩 쌓으면서 죽음으로 가는 것일 테죠. (206p)
안이한 단정 (210p)
책 표지에 ‘첫 번째 무라카미 라디오’라고 작게 써진 글자를 완독 후에 보았다. 공감이 되는 표현이었다. 언젠가 다시 독서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라디오를 켜듯 이 책을 펼쳐보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