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출발한 지 어느덧 3시간이 훌쩍 지 났지만 아직 지나온 만큼 더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일행의 말에 잠시 쉬어갈 겸 차를 세웠다. 정비 되지 않은 도로를 운전하기란 꽤 피곤한 일이다. 곰보를 연상 시킬 만큼 여기저기 패여 있는 도로는 핸들을 잡은 나에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니 그제야 비로소 오염 되지 않은 아름다운 하늘과 산,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는 차량도 드물 만큼 외진 시골.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시골마을은 그저 평화스러웠다. 곳곳에 반군들이 정부에 대항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콜레라와 에볼라, 말라리아 등이 수많은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만 이곳은 그런 것들과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보였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평화로움을 더했다.
멀리 커다란 뿔을 뽐내는 물소들을 물가로 모는 아이는 물소 뿔보다 작아 보인다. 그 곁으로 작은 계집아이가 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제 몸 집 만한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힘겹게 길을 가고 있다. 작은 실타래처럼 보이는 것을 마치 공인양 차고 노는 아이들은 마냥 즐겁고,서너 살쯤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는 같이 놀아 주지 않는다고 서럽게 울고 있다. 갓난아기 동생을 등에 업은 계집아이들의 재잘거림, 작은 화로에 무엇인가를 굽고 있는 장난기 가득한 사내아이들. 무척이나 친숙한 모습들이다. 어릴 적 우리네 시골 풍경이 그립다.
지나가던 작은 아이들이 낯선 외국인을 보자 잠시 멈추어 서서 쳐다 본다. 무엇이 그리도 신기한지. 서로가 한참을 쳐다 보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사탕이 몇 개 있다. 사탕을 꺼내 보이며 아이들을 불렀더니 입을 귀에 걸고 뛰어 온다. 새 까만 얼굴에 유독 하얀 치아가 눈에 띈다. 오염 되지 않은 해맑은 미소가 보기에 좋다. 사탕을 손에 쥐고 좋아라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멀리 떠난 아이들이 순식간에 모여든다. 부러운 마음에, 혹 나도 하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아쉽게도 줄 것도 없고, 가야할 길도 있어 그곳을 떠날 셈으로 차에 올랐다. 사탕을 얻은 아이들이 고맙다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아이들도 사탕 대신 뿌연 먼지만 남기고 떠나는 우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사이드 밀러에서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흔들어준 아이들.
그 후로 적지 않은 시간들이 흘러 갔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남루한 아이들의 모습과 해맑은 미소가 생소 하게 보였기 때문이리라. 천사처럼 맑디 맑은 미소는 결코 집에서 쓰는 걸레만도 못한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몹쓸 사고방식이 그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몹쓸 생각. 행복은 가진 것이 많아야 누릴 수 있다는 삐뚤어진 사고 방식은 물질 만능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물질 만능주의는 이 시대의 최고의 가치와 미덕으로 통한다. 일류대를 가려는 몸부림도, 대기업에 입사 하려는 치열한 경쟁도, 성형을 하고 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돈으로 귀결 된다. 돈을 많이 가지면 정말 행복할까? 억 단위를 넘어서서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진 이들은 물질 만능주의의 기준에서 보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형제들끼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자 다툼을 넘어 법정소송까지 이르고, 툭하면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는 그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우리가 누리려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행복지수는 오히려 높더라는 어느 리서치 보고서를 굳이 끄집어 내지 않아도,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자살률이 오히려 높아지더라는 어느 신문의 기사를 끄집어 내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소득과 행복은 별로 상관 관계가 없다는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물질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어릴 적 그러했듯이 지금도 작은 사탕 하나에 행복해 하는 아이들이 있다. 지금의 우리는 무엇에 행복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