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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11. 2020

#8  나만 몰랐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8  나만 몰랐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매년 방학이나 명절이면 시골 큰 아버지 집으로 놀러오던 아이들은 어른들이 성묘 다녀오는 동안 앞마당에 불을 피워 놓았다.  큰 아버지 집에 오면 앞마당에 불을 피워 놓고 감자며 옥수수 등을 구워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이들은 막내 삼촌 민준이 분명 불에 구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잔뜩 들고 올 것이라 믿었다.  자신들과 나이 차가 적은데다 유별나게 예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조카들은 민준을 잘 따랐다.

    민준은 낮에 산에서 주워온 알밤이랑 창고를 뒤져 찾아낸 감자들을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 밑으로 조심스레 하나씩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창고로 가 형수가 담가놓은 식혜를 들고 와 조카들에게 나눠주었다.  민준은 조카들이 마냥 예쁘기만 했다.  갓난 아이 때부터 기저귀며 분유며, 기회만 되면 자기가 하겠다며 서툰 솜씨로 조카들을 돌보아 왔으니 오죽 이쁠까싶다.  

    방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졌다.  명절에 모이면 늘 술판과 화투판이 벌어지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민준은 거기에 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껴주지도 않았지만 옆에서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계속되는 심부름에 구경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소외감을 느끼곤 했지만 워낙에 나이 차가 있는지라 술판이나 화투판에 껴들어가기도 뭐했다.  그래도 이번엔 조카들이 많이 컸으니 나한테 심부름 따위는 안 시키겠지 생각하며 슬쩍 만만한 작은 형 뒤에 앉았다.
두 형과 누나 부부, 이렇게 네 명이니 잘 하면 한 자리 차지하고 같이 놀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자 누나가 가서 술이랑 담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평소 같으면 끽 소리도 안하고 다녀 올 텐데 오늘은 왠지 한 번 뻗대 보고 싶었다.
- 애들두 많은데 왜 애들 안 시키구?
- 애들 아직 미성년잔데 어떻게 술이랑 담배 심부름을 시키냐.  니가 얼른 갔다 와.

    ‘미성년자.  난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부터 술 심부름, 담배 심부름 잘만 시키드만 지 새끼들이라구 챙기구 있네.’
민준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마지못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민준을 쳐다보았다.  그 가운데 민준을 가장 잘 따르는 혜주가 짐짓 눈치채고 묻는다.
- 삼촌, 심부름 가?
- 응.
- 내가 갈까?
- 아냐, 술이랑 담배 사는 거라 내가 가야해.
- 우리도 사 올 수 있는데.
- 니들은 미짜라 걸리면 난리난다.  언능 갔다 올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민준은 어려서부터 자신에게만 심부름을 시키는 형들과 누나가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조카들 시켜도 민준이 대신 갔을 것이다.  민준은 조카들이 아까워 단 한 번도 심부름을 시켜본 적이 없었다.

- 진짜, 너무들 한다.
- 그러게.  왜 맨날 막내 삼촌만 시키는데.  미안해 죽겠어.
    아이들은 늦은 밤 혼자 어두운 시골 길을 걸으며 심부름을 가는 민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왠지 쓸쓸해보였다.  매번 함께 놀지도 못하고 심부름만 다니는 민준이 안쓰러웠다.  어떨 땐 앉아 있을 새도 없이 심부름만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자신들도 다 컸는데 매번 민준만 부려먹는 어른들이 얄미웠다.  술이랑 담배야 그렇다 치지만 다른 것들은 당연히 어린 자신들을 시켜도 될 텐데 그러지 않는 어른들을 보며 얄미운 마음에, 심부름이나 다녀야하는 민준이 안쓰러운 마음에 어른들이 유독 민준에게 그러는 이유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꺼내선 안 되는 이유들이지만 아이들은 결국 꺼내 버렸다.
- 너무하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같이 살았으면 이젠 삼촌을 인정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 그러게 말야.  막내 삼촌두 벌써 서른이 넘은데다 결혼까지 했는데...

    아이들은 삼촌 편에 서서 열을 올려가며 역성을 들었지만,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민준이 조카들에게 장난을 쳐볼 요량으로 뒤로 돌아와 숨어 있다는 것을.  작게 말해도 선명하게 들릴 만큼 가까이에서 삼촌이 모든 것을 듣고 있으리라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민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민준이 알겠는 것은 단 한 가지,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온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들킬까 그것이 더 무서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야 겨우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민준은 집에서 한참 떨어진 자그마한 마을 저수지에 도착했다.  온통 까만 색 뿐이었다.  민준은 서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조카들이 나누던 대화들을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다.  그제서야 민준은 어릴 적부터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하나 하나 씩 꿰어 맞춰지기 시작했다.
-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살지 못했던거였어.  방학 때마다 시골에 와도 말 한마디 안해주던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 목소리도 모르는 놈이 되어 버렸던거야.  엄마가 툭하면 나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도 그래서 그랬던거고, 나만 아니었으면 하는 말도 그래서 그랬던거야.  외할머니가 유독 나만 끼고 돌았던 것도 그래서 그랬던거야.  나만 아무것도 몰랐던거야.  난 이제 어떻게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장모의 전화였다.
- 여보세요?
- 한 서방, 언능 와야 쓰겄네.  
- 네?  
- 아가 나올라케서 지금 병원으로 가네.
- 네, 바로 올라 갈께요.


--------------  감사합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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