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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10. 2020

#7  비석의 비밀

#7  비석의 비밀

    1984년 11월.
    태주는 그간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킨 탓에 결국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온 가족이 슬픔에 잠긴 채 장례를 치렀지만 민준은 고등학교 진학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로 장례에 참여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태주의 죽음을 민준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아버지가 끝끝내 인정할 수 없었던 민준을 참석시키지 않는 것이 나름 아버지 태주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 것이었다.  또한 비석의 뒷면에 응당 새겨져야할 자녀들의 이름에서도 민준의 이름은 제외시켰다.  혹여 민준이 장례에 참석해서 비석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뭐라 말을 해줄 자신이 없기도 했다.  결국 민준은 장례가 진행되는 5일간 아무것도 모른 채 집에 홀로 남겨져야만 했다.




    2009년 10월.
    추석을 맞이하여 온 가족들이 모였다.  영숙은 자녀들과 함께 오랜만에 남편 태주의 묘소를 찾았다.  민준도 함께 하였다.  민준은 처음 가보는 아버지의 묘소였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저 가족들과 함께 뒷산으로 산책 가는 기분이었다.
    묘소에 가는 길은 그간 아무도 안다녔는지 수풀이 무성했다.  앞장 서 가는 큰 아들 인석은 벌초를 하기 위해 들고 온 낫으로 앞길을 헤치며 뒤따라오는 가족들이 편히 올 수 있도록 길을 내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자 작은 봉분이 보였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쉬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풀이 무성하게 자란 봉분은 큰 아들 인석과 작은 아들 지석의 손을 통해 차츰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영숙과 큰 딸 미숙은 봉분 주변을 정리하였고, 사위 철우는 묘비 주변을 정리하였다.  
    막내 민준은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없을뿐더러 뭘 해야 할지도 몰라 우두커니 묘비만 바라보다 이내 주변에 즐비한 밤나무들로 시선을 옮겼다.  밤이 참 많이 열리기도 했다.  주렁주렁 매달린 밤송이 사이로 굵은 밤들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무 밑을 보니 매달리기 힘겨워 떨어진 밤송이들이 꽤 많아 보였다.  민준은 할 일도 없이 우두커니 있으려니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며 밤송이들을 줍기 시작했다.  아직은 밤송이에 무수하게 솟아있는 가시들이 타인의 손길을 거부하며 마구 찔러댔지만 민준은 가시들 사이로 나뭇가지들을 집어넣어 알밤을 꺼내었다.  민준이 애쓰며 꺼낸 알밤은 제법 굵직하니 탐스러웠다.

    한편 묘비 주위를 정리하던 철우는 묘비 뒷면에 응당 있어야할 막내 민준의 이름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철우는 가까이에서 벌초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는 인석에게 물었다.
- 형님, 이것 좀 보소.
- 왜?  뭐 있어?
- 아니, 그게 아니라, 묘비에 민준이 이름이 안 들어갔네요.  어찌 된 거요?
    순간 인석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비석 만드는 곳에서 이름을 안 넣었더라고.  나두 한참 지나서 아는 바람에 어떻게 못했어.
    인석은 미리 준비해 두지도 않았는데도 쉽게 대답했다.
- 아니, 어떻게 자식 이름이 안 들어갈 수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얼른 넣어줘야 되지 않겠어요?
- 어, 그래야지.  민준이 알면 서운할 테니 말하지 마.  담달에 볼 일 보러 오면 그때 해줄라니까.

    두 사람의 대화로 인해 안절부절못하며 민준과 철우를 번갈아 쳐다보는 다른 가족들의 시선을 정작 민준과 철우는 느끼지 못했다.  민준은 밤을 줍느라 정신이 팔려 인석과 철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민준은 그저 제 손 안에 가득 담긴 알밤들로 인해 즐거웠다.

-------------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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