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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13. 2020

#9  용서와 이해의 사이에서

#9  용서와 이해의 사이에서

    매일 한 편씩 글을 올리려 했는데 워낙 어려운 주제라서 감정을 추스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하루 걸러볼 요량으로 '아프리카에서 웬 순대'라는 글을 대신 올렸는데 이게 하루만에 조회수 7,000을 넘어버리는 바람에 감정은 잡지도 못하고 통계만 보며 히죽히죽 대기만 했습니다.

    오늘도 조회수가 계속 올라가는 바람에 알림을 꺼버리고 감정을 잡으려는데 조회수가 궁금해서 잘 안되더군요. 한참을 애먹다가 겨우 마무리 했습니다.

    다음 발행글이 마지막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출생의 비밀.

    삼류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그런 레파토리가 아니다.  현실이다.  그렇기에 민준은 더욱 기가 막힌다.  자신이 알고 있고 지금껏 써왔던 이름 한 민준.  그런데 한 민준이 아니었다니.  민준의 친부는 안 씨 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안 민준이어야 맞는 것이지만 민준은 친부의 성씨는 물론 친부라는 단어 자체가 자신과 관계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그에 대해 그 누구도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민준의 정체성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민준이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자신을 나타낼 때 제일 먼저 사용되는 이름부터가 거짓이니 그 무엇이 진실일 수가 있을까.  다들 알면서도 왜 한 마디 말도 안 해 주었던 건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같은 형제임에도 다른 형제들 사이에 어울리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어 따져 묻기도 어려웠다.  그 누구도 민준의 질문에 답해줄 수 없을 것이다.     


    민준은 자신을 낳아준 어미를 향한 의문을 넘어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깟 돈이 무엇이기에 자신을 사랑의 결실이 아닌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부도가 났으면 폐기시켜 버릴 것이지 왜 굳이 낳아야만 했는지도.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사랑의 결실이라는 상식조차 무너져 내린 민준은 그간 그토록 안쓰러워하던 고아들이 차라리 부러웠다.  그들은 어찌되었든 사랑의 결실일 테니.     


    민준은 아비의 사업실패로 인한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었던 어미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혹독한 고통의 삶을 살던 때였기에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난 어미의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과 가난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 컸으리라.  높은 곳일수록 떨어지는 충격은 더 강하다고 하지 않나.  그랬기에 그 충격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어미가 지닌 자존심이란 실로 대단하지 않았던가.  그런 어미가 남들 보다 못하거나 혹은 비슷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용납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 들어 할미가 된 지금도 조금이라도 못 가지고 못 나고 못 배운 이들을 향한 참지 못할 우월의식이 툭툭 튀어나오는데 젊었을 때야 오죽했으랴.  어디에 내놔도 군계일학이라는 미모의 젊은 여성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화류계로 빠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아닌가.  사실 티비에 나오는 유명 여배우들조차 영숙의 미모를 능가하지 못할 만큼 영숙은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민준은 그런 어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민준은 자신을 낳아준 어미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차마 욕까지 할 수는 없기에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곧 돌아올 나의 생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태어난 날에 세상이 멸망하였더라면, 아이를 배었다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신의 노여움에 휩싸여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온갖 악귀들이 그 날을 저주하였더라면, 내가 모태에서 문을 열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태에서 죽어 나왔더라면...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나를 떨치려 몸을 던졌을 때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독한 약들을 마시기를 거부하였던가.  아,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어미의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내가 내 아이의 탄생을 마음껏 즐기고 기뻐하였을 것을.  차라리 낙태되어 땅 속에 묻힌 어느 아이처럼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민준은 자신의 잉태와 탄생을 저주하는 가운데 수차례 자살의 충동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충동은 핸들을 어 도로 옆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려 했고,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아 반대 차선으로 뛰어들려 했으며, 저 앞에 느릿느릿 달리는 대형 트럭 밑으로 집어넣으려 했지만 민준의 본능적인 삶의 욕구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민준은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어 휴게소로 들어가 가장 어두운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마음껏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세찬 가을바람이 민준의 서러운 울음소리와 흐느낌의 몸부림을 감춰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한참을 몸부림치고, 한참을 소리 지르다 지쳐 더 이상 울 힘도 사라진 민준은 차 문을 열고 그동안 그토록 세차게 문을 두드리던 바람을 맞아 들였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가자 민준은 그제야 정신이 좀 들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바람이 나무를 쥐고 흔들기도 했다가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과 쓰레기들을 이리저리 흩어놓기도 했다.  드문드문 세워진 대형 트럭들이 멀리 휴게소에서 쉬고 있는 시선들로부터 민준을 가려준다.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민준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머리에서는 알고 있고 한편으론 이해도 되지만 헤아릴 수 없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들이 분출하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차라리 어미를 용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삶의 몸부림 가운데 빗어진 순간의 오류를 자식이 용서해야 할 사안인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 없었다.  용서라는 수단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  용서를 최고의 덕목과 선으로 치켜세우고, 피해자에게 그 덕목을 행사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용서는 ‘의무’라기 보다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피해 상황에서 벗어나 이전처럼 혹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과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용서를 선택할 수도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가 감정을 치유하고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새로이 시작하고자 가해자를 용서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용서의 도덕적 위치는 어디인가.  자신도 한 인간으로서 다양한 단점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선악이 모두 혼합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해자를 ‘악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게 되며 연민의 감정과 용서의 마음을 갖게 된다.  진정한 자기 사랑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어야만 타자 사랑의 진정성도 작동될 수 있으며 그 타자 속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부모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아 결국 식민화하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소유하려 하면서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곤 한다.  민준의 어미가 바로 그 왜곡된 자기 사랑으로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이해하면 되는 일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겪고 있지 않은가.  이해만으로는 머리와 가슴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머리와 가슴의 거리는 고작 30㎝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해나 용서의 측면에서는 너무나도 먼 거리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도대체 어찌 해야 가녀린 새끼 사슴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까.  민준은 고속도로를 무섭게 질주하는 차량들을 무심히 쳐다본다.


-------------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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