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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12. 2020

아프리카에서 웬 순대

뱃속의 아이가 먹고 싶다는데

    코로나로 인해 매사에 조심스러워진 아내는 마트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나를 시킨다.  나는 코로나가 비켜 간다냐?고 따지고 싶지만 그랬다간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낯선 타국에서 무슨 고초를 겪을지 모르니 순순히 따를 수밖에...  종종 들르는 한인 마트에 들어가 아내가 건네준 목록들을 보면서 일일이 대조해가며 장바구니에 넣고 있는데 한쪽에 평소 보지 못하던 낯 익은 얼굴 하나가 있다.  순대야!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며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가슴에 붙어있는 도도하고 거만한 가격표는 나의 손길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포기하고 나머지 물건들을 챙기고는 얼른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첫 아이 때 생각이 났다.  아프리카에서 몇 년 머무르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생겼다.  뱃속의 아이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지에서 뿜어내는 자유로움을 맛보며 자라났고,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커갔다.  종종 엄마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다양한 메뉴들 가운데 맛있겠다 싶은 것들을 하나씩 골라가며 주문을 하곤 했는데 가끔은 감당못할 주문을 할 때가 있다.

    하루는 아내가 머뭇머뭇 거리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 저기 있잖아요.  음...  순대랑 단무지가 먹고 싶어요.
- 응???  순대?  
- 네.
- 단무지도?
- 네...
- 여기 아프리카에서?  
- 네......
    하아...  갈수록 대답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나름 고민고민하다 꺼낸 말이겠다 싶었지만 참으로 난감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순대와 단무지를 구하려면 이곳 우간다에서 남아공까지 가야 겨우 구할 수 있는 엄청 희귀한 아이템이었다.  특히 순대는 비행기로도 공수 못하는 품목이다.  한겨울에 임신한 아내가 딸기를 먹고 싶어했다는 조상들의 한 서린 전설이 생각났다.  이걸 어쩌나.

    가까운 곳에서 유일한 한인 식당 겸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시는 집사님을 찾아갔다.  한인 교회에서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나마 몇 달 되지 않아 뭔가를 부탁하기에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신다.  단무지는 재료가 없어 만들 수 없지만 순대는 재료도 있고 만들 줄도 안다며 산모를 위해 기꺼이 해주시겠단다.  대신 내일 아침 일찍 와서 거들라 하신다.  오키, 노 푸라블럼.  할렐루야!

    다음 날 아침 일찍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보니 집사님은 새벽같이 일어나 꽤 멀리 떨어진 도축장에 재료 구입하러 가셨다고 한다.  커피 한 잔 마시며 기다리는데 잠시 후 집사님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여니 거기엔 시뻘건 피와 곱창, 갖가지 부속들이 있었다.
    집사님은 종류별로 분류를 하시더니 돼지창자를 꺼내어 호수에 대고 물을 흘려 씻으시고는 그 안에 굵은 소금을 넣어 내게 주신다.  터지지 않게 잘 주물러가며 씻으라시며.  분부대로 주물주물 해가며 씻으려는데 이게 당최 미끌미끌해서 쉽지가 않다.  그러는 사이 집사님은 당면을 끓는 물에 담그시고는 야채들을 다지기 시작하셨다.  칼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아 보여 혹 주방장 출신이시냐 물었더니 군대에서 조리병이셨다고.  현란한 칼 솜씨에 각종 야채들은 대항할 힘을 잃고 쓰러져갔고 마침내는 형체도 없이 으스러졌다.  그렇게 으스러진 야채들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넓은 대야에 쓸어 넣고는 미리 준비하신 찰쌀밥, 다진 돼지고기, 선지, 불린 당면들을 함께 넣어 말없이 내게 밀어 주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버무리란 말씀.  일회용 비닐 장갑이 없으니 늘 착용하고 다니는 100년은 족히 사용 가능한 천연 가죽 장갑으로 대체하고는 바닥까지 훑어가며 버무리기 시작했다.  아, 이게 쉬운게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나지만 뱃속의 아기가 먹고 싶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버무리다 고만 되었다는 반가운 소리에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들을 닦으며 뒤로 물러섰다.  집사님은 아까 씻어둔 돼지 창자를 가져 와 한 쪽 끝을 묶고 다른 한 쪽에는 팻트병을 잘라 만든 깔대기의 좁은 주둥이 쪽에 끼우시더니 버무린 속을 깔대기에 넣고 창자 안쪽으로 들어가게 밀라 하신다.  꽉 채울까요?하니 나중에 터질 수 있으니 약간 설렁설렁하게 채우라 하신다.  그렇게 깔대기에 속을 올려놓고 좁은 주둥이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다보니 물컹물컹하면서도 찐득한 느낌이 영 맛있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넣다보니 어느새 그 큰 대야에 담겨있던 속이 전부 창자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님은 중간중간 비어있거나 뭉쳐있는 곳을 찾아 고르게 펴 주고는 묶지 않은 한 쪽마저 묶어 찜통에 예쁘게 돌돌 말아 넣으셨다.  이제 쪄내기만 하면 끝이라신다.  수돗가로 가서 함께 세수를 하고는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집사님은 고학력자는 아니시지만 워낙에 다양한 경험들을 하신 덕분에 잡학다식했다.  순대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씀들을 해주시는데 원래 순대는 귀한 고기나 찹쌀을 채워서 만드는 귀한 음식으로 생일이나 명절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며 한국전쟁 이후 당면공장에서 당면 자연건조 중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다 순대 재료로 사용해보자 생각을 하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전쟁 직후 굉장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싸구려 재료만 가지고 배를 채우려고 만들어낸 음식이라 북한 탈북자들은 남한에서 받은 문화충격을 이야기할 때 이 당면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고.  자신들이 먹던 순대는 이렇지 않다면서.  
    고기순대는 평양의 향토음식으로 돼지고기와 찹쌀, 소 선지 및 각종 채소를 넣어 만드는데 좁쌀도 함께 넣기도 한다.  보통은 소 선지가 아닌 돼지 선지를 사용하는데 돼지 선지는 검붉은 색이 나오는 반면 소 선지는 약간 옅은 붉은 색이 나온다고 한다.  아바이순대는 함경도 지방의 향토음식으로 평양과는 달리 대창으로 만들고 어슷썰기 때문에 상당히 큼지막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이라고.  그 외에도 지금은 만들 수 조차 없는 곰 내장으로 만든 곰 순대며, 명태 순대며, 연변 순대 등과 함께 남한에서는 피 순대, 병천 순대, 백암 순대, 오징어 순대 등이 있다고.  이러쿵 저러쿵 해박한 상식을 자랑하시는데 미리 맞추어둔 알람만 아니었으면 이박삼일도 풀어놓으실만큼 대단한 상식과 입심이다.

    뚜껑을 여니 뜨겁게 달아오른 통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허연 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얼굴을 치고 도망간다.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리니 그새 다 빠져나가고 잔챙이들만 군데군데서 올라온다.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어 안에서 뜨거운 수증기들로 한참을 고생했을 순대가 보였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피부가 허연게 조금은 짠해 보였다.  그래도 어디 한 군데도 터진 곳은 없었다.  꽤나 억울했는지 잔뜩 열 받은 순대를 조심스레 꺼내어 도마 위에 올려 놓고는 날이 잘 드는 칼로 가차없이 베어냈다.  피가 안 난다.  잘 익은 거라신다.  소금에 찍어 맛을 보니 걱정하던 비린내는 하나 없고, 촉촉함과 쫄깃쫄깃한 식감이 입 안 가득 채워진다.  순대를 들고 바로 튀고 싶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셨는지 집사님은 우리 몫이라며 인심좋게 길게 한 덩어리 잘라내어 비닐 봉지에 담으시더니 언능 가서 먹이라고 하신다.  염치없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는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순대를 꺼내 놓으니 아직 따끈따끈하다.  하기야 이곳이 아프리카니 차가운 것도 밖에 꺼내놓으면 따뜻하게 뎁혀진다만은...  따끈따끈한 순대를 본 아내는 내 얼굴은 쳐다도 보지않고 왔냐는 말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가 칼과 도마를 들고 와서는 잘라 달란다.  알았으니 일단 앉으라고 하고는 대충 손을 씻고서 자르기 시작하는데 손이 먼저 달려들어 채 잘리지도 않은 순대를 덥석 집어들고는 입에다 집어 넣는다.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어쩔줄 몰라한다.  너무 행복하다며, 너무 맛있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소금도 안 찍었는데...
    열심히 순대를 썰어 접시에 올려 놓기도 전에 아내의 손이 도마 위에서 칼에 찔려 쓰러지는 순대를 낚아채 입에 집어 넣는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했을까.  아내가 갑자기 소파에 등을 기대며 더 이상은 못먹겠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기권을 선언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표정은 기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여유였고, 포식자의 포만감이었다.  안그래도 불룩한 아내의 배는 더욱 불룩해져 당장이라도 출산할 것만 같았다.  

    만족해하는 아내의 모습에 나도 만족스러워 이제 나도 먹어야지 하며 순대를 썰려는데 순대가 없다.  아!  손바닥에 가려 안보였다.  미안하다, 순대야.  나도 너 참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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